남양 전씨 집성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737
한자 南陽 田氏 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집성촌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을 중심으로 세거한 남양 전씨 집성촌.

[명칭 유래]

남양 전씨의 집성촌이 있던 석성(石城)은 고려 초부터 석성현으로 유지되었다. 1914년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으로 개설되었다. 1973년 석성면 현북리가 부여읍으로 편제되었다.

[형성 및 변천]

고려 말 전주(田柱)[?~?]가 공주로 유배되었고, 전주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지금의 부여군 석성면에 입향한 것이 남양 전씨 부여 집성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전득우의 아들 전흥(田興)[1376~1457]이 이서(吏胥)로서 태종을 잠저(潛邸) 때부터 섬긴 것이 계기가 되어 원종공신에 녹훈되고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가문을 일으켰다. 전흥의 아들 대인 전가생(田稼生) 때에 이르러 남양 전씨 가문이 크게 번성하여 다수의 문과 급제자와 성균관 진사 등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전가생의 동생 전수생(田穗生)이 유배형을 받고 손자인 전우치(田禹治)가 처벌되면서 가문이 일시적으로 쇠락하였다. 16세기 이후 남양 전씨는 주로 석성면을 근거지로 생활하며 공신의 자손으로 품계를 유지하거나 하위 관직을 지내면서 사회적 지위와 가세를 유지하였다.

[자연환경]

남양 전씨 세거지인 석성면 봉정리와 포사마을은 두 냇물이 몰려 있는 모래사장 근처의 포구라고 하여서 사포, 사포리, 개사리라 불렸다. 또한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봉두정(鳳頭亭), 조선 시대 사창이 있었던 마을이라 창리(倉里)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황]

조선 후기 남양 전씨부여군 석성면봉정리, 양화면시음리를 중심으로 세거한 것으로 확인된다. 1987년에 발간된 『부여군지』에 따르면 부여군의 남양 전씨세도면에 2호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부여의 남양 전씨 관련 유적으로는 현재 석성면 봉정리전득우전흥의 묘소, 묘비, 재실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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