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46 |
---|---|
한자 | 權相銖 |
영어공식명칭 | Gwon Sang-su |
이칭/별칭 | 권상수(權相洙),권우송(權又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3년 - 권상수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권상수 군자금 모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권상수 무기 및 군자금 모집 활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25년 - 권상수 제2차 유림단의거 |
몰년 시기/일시 | 1941년 - 권상수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권상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권상수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
거주|이주지 | 권상수 이주지 - 중국 베이징[北京] |
활동지 | 권상수 활동지 - 중국 베이징[北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상수(權相銖)[1873~1941]는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 영주 지역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베이징[北京]에서 유림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는데, 주로 무기 및 자금조달과 고문 역할을 하였다.
[가계]
권상수는 권상수(權相洙) 또는 권우송(權又松)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경상도 영천군 봉향면 하망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제2차 유림단의거의 주역인 송영호(宋永祜)[1903~1968]의 처남이다.
[활동 사항]
권상수는 박제선(朴齊璿)[1878~1938]·권영목(權寧睦)[1884~1935] 등이 운영하는 영주시장의 대동상점(大同商店)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권상수는 1916년 3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송주찬(宋柱燦) 등과 함께 영주 지역의 자산가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약 1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영주헌병분견소에 발각되면서 관련자 대부분이 체포되고, 자신도 포위망을 피해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동상점은 당시 영주 지역 자산가들이 출자한 잡화상이었지만, 1910년대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의 거점이자 자금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양한위(梁漢緯)[1883~1949]가 『양벽도공제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에서 대동상점은 “거금을 소지하고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대원들의 무기를 후원하였다”라고 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권상수도 대동상점과 연결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동지들이 1918년 3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자 국내 활동을 중단하였다.
권상수는 만주를 거쳐 베이징의 풍태남(豊太南) 삼가구농장(三家口農莊)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1925년 4월 베이징에서 송영호(宋永祜)[1903~1968]·박제형(朴濟衡)[1882~1948]·김동진(金東鎭)[1867~1952] 등과 함께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주도한 유림단(儒林團)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내몽고 지방의 미개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사들여 만주지방의 한인들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10년 동안 군대를 양성하고 실력을 길러 일본과 전쟁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방략을 세웠다.
권상수는 1925년 4월 베이징에서 김창숙·송영호·이봉로(李鳳魯)[1901~1940]·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과 만나 필요한 자금 모집에 대해 의논하고, 이를 위해 송영호를 먼저 국내로 잠입시켰다. 이어서 김화식이 국내로 잠입할 때는 권상수가 제공한 자금으로 권총 2정과 실탄 25발을 마련하여 반입시켰다. 김화식은 흑색 모젤 권총 9연발 2정과 실탄 25발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무기를 소지한 채 송영호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 활동은 1926년 4월 단원들의 체포로 중단되었다. 권상수도 이 사건과 연계되어 고초를 겪은 뒤 1941년 6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권상수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