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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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復圭 |
영어공식명칭 | Jang Bok-gyu |
이칭/별칭 | 성삼(聖三),사이재(四而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26년 - 장복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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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장복규 증광시 장원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92년 - 장복규 의금부도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장복규 태봉전투 참전 |
몰년 시기/일시 | 1896년 - 장복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장복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장복규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
거주|이주지 | 장복규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
활동지 | 장복규 활동지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서상열 의진 찬획 |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장복규(張復圭)[1826~1896]는 1896년 1월 서상열 의진(徐相烈義陣)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태봉전투(台峰戰鬪)에서 패전한 후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가계]
장복규의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삼(聖三), 호는 사이재(四而齋)이다. 아버지는 장원진(張元鎭),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세조 때 적개공신에 녹훈된 연복군 장말손(張末孫)[1431~1486]의 후손이다. 1826년 9월 9일 지금의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장복규는 1885년(고종 22) 치러진 증광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892년(고종 29)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시국을 개탄하여 사퇴하였다. 1895년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장복규는 1896년 1월 결성된 영천의진(榮川義陣)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갔으나, 군기(軍器)가 갖춰지지 않은 것을 보고 노병(老病)을 칭탁하고 귀향하였다. 곧이어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소모장 서상열(徐相烈)[1854~1896]이 경북 북부 지역에 내려와 연합의병진 결성을 추진하자, 1896년 1월 17일 서상열 의진에 들어가 찬획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안동·선성·풍기·순흥·영천·봉화·호좌 7읍 의병진의 ‘예천회맹(醴泉會盟)’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3월 29일 태봉[지금의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의 일본군 병참기지 공격에 참여하였다가, 패전 이후 예천에서 서상열과 헤어져 일시 귀가하였다.
장복규는 1896년 5월 9일 안동에서 파견된 군졸에게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이날 갑자기 들이닥친 안동의 군졸들이 문을 부수고 집안의 기물을 몰수하였다. 1896년 5월 10일 안동부에 도착한 뒤 안동관찰부 참사관 홍필주(洪弼周)[1857~1918]로부터 “너는 과연 장모(張某)인가? 영남 사람이 영남에서 의병을 하지 않고 서모(徐某)에게 종사한 까닭이 무엇 때문인가?”라는 추궁을 당했다. 이에 그는 “복수거의(復讎擧義)는 같은 것인즉, 어찌 호서와 영남의 차이가 있겠는가? 서상열은 진실로 소박한 사람이다. 나와 같은 의리를 가지고 있으니 무슨 말로 따르지 않겠는가. 진실로 의병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서상열의 행방을 묻는 관군에게 모진 고문당하여 장독이 크게 올랐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86년 5월 12일 안동감옥에서 총살당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복규의 문집으로 2권 1책의 『사이재집(四而齋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옥중일기(獄中日記)」가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장복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