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
경상남도 양산시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 춤의 하나. 우리나라 전통 춤을 구시대의 계급에 따라 분류한다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와 민족의 중추 세력이었던 양반 사회의 정통 춤과 무속 그리고 서민층이 즐겨 추던 즉흥 춤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궁중무는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무속과 서민층의 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양반 사회의 정통 춤은 양반 계급의 몰락과 함께...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에 있는 김해김씨 재실. 경옥재는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49세손 김관(金管)[1250~1348]을 중시조로 하는 녹사공파(錄事公波) 후손의 재실이다. 김관은 자가 희범(希範), 호가 정성헌(靖醒軒)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고려 말의 문신이다. 김관의 자손인 절효공(節孝公) 김극일(金克一)·문민공(文愍公) 탁...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김녕김씨 재실. 경의재는 김녕김씨 충의공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인 김재연(金在衍)·김재간(金在衎)·김재형(金在衡)·김우권(金禹權) 등의 재사이다. 경의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 중 하나이다. 그의 후손인 김재연은 자는 영보, 호는 양심재이며, 성품이 순수하고 인정이 많고 검소하였다. 늙어서는 성리학을 연구하였는데 경과...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외석리에 있는 나주오씨의 제단(祭壇). 나주오씨의 제단으로 주위에는 나주오씨 조상묘가 있다. 이전에는 단의 이름을 치등제단(治登祭壇)이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외석리는 나주오씨의 집성촌이다. 중시조인 진사공 오속규의 후손인 오손을 일대로 하여 8세 오명한이 울산에 입거하고 12세 오세윤에 이르러 양산에 이거하였다....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대(臺). 경파대는 조선 고종조 사인(士人) 정임교(丁壬敎)가 향토의 사우(士友)들과 수창(酬唱)하던 승경지(勝景地)다. 정임교는 이황(李滉)의 문인인 고암(顧庵) 정윤희(丁胤禧)[1531~1589]의 후손으로, 자는 남서(南瑞), 호는 매촌(梅村), 일명 규열(奎烈)이라고도 하며,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정임교는 양산향교의 문묘...
-
양산의 지도는 향토의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도구이다. 이는 지도가 종합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이 양산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그려진 양산의 고지도는 제작 당시의 위치 정보를 이미지로 전달하기 때문에 텍스트로 쓰인 지리서보다 위치 파악에 효율적이다. 따라서 양산의 고지도는 양산 지역의 향토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금산리에 있는 대(臺). 금호(琴湖) 이수생(李秀生)의 후손인 조선시대의 문신 이일녕(李一寧)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쌓은 누각이다. 이수생은 조선 명종 대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금산리에서 출생하여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으로 첨정에 올랐고, 선무원종공신 삼등훈을 받았다. 이수생의 후손인 이일녕은 천성이 후덕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
-
안방걸을 시조로 하고 안우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양산시의 세거 성씨. 고려 태조대에 대장군으로 광주군에 봉해진 안방걸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판사공 안몽득의 손자 안우(安宇)가 입향하여 형성된 봉사공파이다.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대에 대장군(大將軍)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8년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으로서 민족 사상 고취 및 불교 연구를 목적으로 한 유심회를 조직하여 신상완(申尙玩)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김법린, 정병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유심회는 같은 해 11월 한용운의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 운동 단체로 발전되었다. 1919년 2월 말에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독립선언문」을 살포...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대성암에 있는 조선 전기 목판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지장보살본원경』은 지장 신앙의 기본 경전이다. 지장보살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려고 노력하여, 죄를 짓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까지도 평등하게 구제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지장보살본원경』에는 지옥의 여러 가지 모습이 나오고 부모나 조...
-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응오(應五), 호는 송강(松崗).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다.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마을 사람들이 공경하여 우러러보았다. 무덤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시묘를 하였다. 조선 철종(哲宗) 때 충훈부·중추부·의금부에 속하여 벼슬아치의 감찰 및 규탄을 맡아 보던 종5품 벼슬인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조선 전기 불교 경전. 서지학적 형태는 사주단변(四周單邊)이며, 반곽(半郭)이다. 계선(界線)은 없고 반엽(半葉)으로 8행(行) 20자(字)로 구성되어 있다. 주쌍행(註雙行)이며, 크기는 34.2×22.5㎝이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제9·10은 조선 전기에 신총(信聰)이 직접 쓴 판...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벌어진 운동. 경상남도 양산 지역은 선각자들의 비밀결사운동 관련을 시작으로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의 신평 의거, 3월 27일의 양산읍내 의거, 이후 1920년대의 청년운동·신간회운동·소년운동·부인회운동·근우회운동, 1930년대 전반기의 혁명적 농민운동, 1941년의 학생운동 등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양력 12월 22일 또는 23일에 지내는 24절기의 하나. 24절기 가운데 하나로,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이다. 동지는 하루의 해가 하지(夏至)로부터 차츰 짧아지기 시작하여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로,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기도 하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길어지므로 옛 사람들은 양(陽)이 생...
-
오래된 마을에는 마을이 이어온 역사만큼이나 그 지명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그 중 소노마을과 소토리 지명에 대해서는 향토 사학자들마다 의견이 매우 다양하다. 마을 주민들 중에 지명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볼 때에는 소노가 된 결정적인 원인을 소노서원에서 찾는다. 우리는 ‘공자님을 모시고 있는 작은 노나라’라고 해서 ‘적을 소’에 ‘노나라 노’자로...
-
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경내에 있었던 초등 교육 기관. 명신학교(明新學校)는 1906년 4월 1일 통도사에 개설되었다. 혼란한 조선 말기 밀려오는 일본 불교계에 대응하여 국내 불교계 지도자를 양성함으로써 조선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구하 스님의 주도로 개교하였다. 교육 내용은 승려에게 필요한 불교학과 경전 외에 신교육 중심...
-
경상남도 양산시 강서동 어곡리 화룡마을에 있는 영일정씨 재실. 정도만(鄭道萬)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12세손으로 조선 숙종대에 합천에서 화룡(化龍)마을으로 이거하여 영일정씨 화룡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반룡재는 1991년도에 건립된 영일정씨 화룡마을 문중의 재실로 정도만과 그의 후손들을 모시고 있다. 반룡재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재기(齋...
-
고려 전기 양산방씨의 시조이자 문신.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월정(月汀). 방송현(房松衒)과 방송구(房松九) 두 아들을 두었으며, 방송현의 자는 성장(成璋)이고, 호는 만익(晩益)으로 증예부참의(贈禮部參議)를 제수 받았다. 방송구의 자는 성복이고, 이조정랑과 충청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방송현의 아들 방규(房圭)는 이조판윤 등을 역임하였으며, 방송구의 아들 방...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 조상의 얼인 의(義)를 근본으로 여긴다는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본법마을에 최초의 주민들이 주거를 시작한 시기를 대략 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인근에 위치한 법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및 고분의 축조 형태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 주거 상황 및 마을의 명칭에 대한 구전이나 문헌적 자료는...
-
전통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불과 연기로 통신하던 제도와 시설. 봉수제(烽燧制)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까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시대부터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 분명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고려 중기부터이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봉수의 수,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연대...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이루어지는 법에 의한 민사 및 형사 사건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국가 작용. 일반적으로 사법은 입법, 행정과 함께 국가 통치 작용의 하나이다. 개인 상호 간 또는 국가와 개인 간의 법률 관계에 관한 쟁의로 소송이 제기될 경우 무엇이 적법인가를 선언하는 행위로서 그 범위는 국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사법 제도는 좁은 의미로 재판 제도를 의미하나, 넓은...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에 있는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삼형제의 사당.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 이전생(李全生)이 조선 태종 때 순찰사로 양산을 순력(巡歷)하다가 하북면 삼수리에 정착하여, 아들 장강공(莊剛公) 이징석(李澄石)과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과 영산군(靈山君) 이징규(李澄圭) 삼형제를 낳았다. 삼수정사는 이 삼형제를 모신 사당이다. 삼수정사...
-
양산향교는 1396년(태조 6)에는 양산초등학교 주위에 있었으며 『조선환여승람』 원사편에 보면 성안의 현 양산문화원 뒤편 느티나무 동쪽에 충렬사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이곳에 충신, 공신의 신주를 이만도 군수가 모셔왔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충렬사 주위에 60여개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19년에 발생한 양산 독립만세운동 때문에 일본 헌병이 충렬사를 파괴하였다....
-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을 빛낸 삼조의열의 비석을 한 곳에 모아 조성한 경위를 밝힌 건립 조성 경위비. 경상남도 양산시에는 왜적에 대항한 신라의 박제상(朴提上), 고려의 김원현(金元鉉), 조선의 조영규(趙英珪) 등 삼조의열(三朝義烈)이 있으며, 이들을 추모하여 군민들이 건립한 비석들이 있다. 매년 조영규가 순절한 4월 15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
-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지명으로 신라 9주(九州) 가운데 하나. 삼국통일 직후 신라는 지방 행정 구역인 9주를 설치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로 상주(上州)·하주(下州)의 땅을 떼어내 양산 지역을 중심으로 삽량주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 34 잡지(雜志) 3 지리(地理) 1 양주조(良州條)의 설치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신기동은 본래 조선시대 양산의 읍내면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 때 마을 뒤에 여부사란 사찰이 있어, 여부사 명칭을 따라 여부라 칭한 때도 있었다. 마을이 확장·발전함에 따라 조선 말기에는 아래새터[下新基], 우새터[上新基], 신기라 불리기도 하였다. 신기마을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상신기마을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1996...
-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 신기마을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동(西洞)마을이라 칭하였다. 서동 마을이 속한 신기동은 본래 양산의 읍내면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 때 당시 마을 뒤에 여부사(余芙寺)란 사찰이 있어, 그 명칭을 따라 “여부”라 칭한 때도 있었으나, 마을이 새롭게 확장 발전됨에 따라 조선 말기에는 ‘우새터’, ‘아래...
-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중동마을이라 한다. 동중동 마을이 속한 신기동은 본래 양산의 읍내면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 때 당시 마을 뒤에 여부사(余芙寺)란 사찰이 있어, 그 명칭을 따라 “여부”라 칭한 때도 있었으나, 마을이 새롭게 확장 발전됨에 따라 조선 말기에는 ‘우새터’, ‘아래새터’ 또는 ‘신기...
-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쌓은 방어 시설. 성곽은 본래 내성(內城)만을 뜻하는 성(城)과 외성(外城)을 가리키는 곽(郭)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곽은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건조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축성 재료에 따라 목책·토성·토석혼축성·석성·전축성(塼築城)으로 나눌 수...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조선 후기 광주안씨 사당. 조선 태종 때의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아들인 계산 안우(安宇), 치암 안주(安宙), 광려 안택(安宅)을 주향(主享)하였고, 임진왜란 공신인 구암 안근(安瑾), 안수(安琇), 주부(主簿) 안시명(安諟命), 첨사(僉使) 안이명(安以命), 매죽헌(梅竹軒) 안신명(安信命)을 배향하였다. 1783년(...
-
소노마을에 들어서면 두 개의 오래된 사당을 만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동래정씨 사당인 소노서원이다. 동래정씨가 이곳 소노마을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려 말 조선 초기로 보인다. 동래정씨의 가보를 보면 고려 초기에 그들의 조상이 경주에서 부산 동래로 들어왔고 이들 중 일부가 고려 말에 소노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동래정씨가 소노마...
-
경상남도 양산시에 속하는 법정동. 경상남도 양산시 삼성동의 남쪽에 위치한 법정동으로서 교통의 요지이며 주거 지역으로서 발전되고 있는 지역이다. 새터 또는 신기라 하였다. 조선 숙종 때 마을 뒤에 여부사라는 사찰이 있어 그 명칭을 따서 여부라 칭한 때도 있었으나, 마을이 새롭게 확장됨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우(위)새터, 아래새터, 또는 이 둘을 합친...
-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주. 호는 구암(龜庵).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안우(安宇)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자, 두 아들 안시명(安諟命)·안이명(安以命)과 조카 안신명(安信命), 사촌 안도수(安導琇)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병사를 모집하여 양산을 지켰다. 구포산과 금정산에서 왜적을 베었고, 양산시 동면 석산리의 은동석굴을 지켰다...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양산 출신으로 큰 공을 세운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조선 중종 때에 평산부사를 지낸 안우(安宇)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안근(安瑾)이며, 동생 안이명(安以命)과 사촌 안신명(安信命)이 있다. 안시명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 아버지 안근, 동생 안이명, 그리고 사촌 안신명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산 고을로 넘어오는 왜적을...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조선 중기 불교 경전 목판. 대장경(大藏經)이라 함은 원래 인도에서 말하는 삼장(三藏)으로 세 광주리를 의미하는 경(經)·율(律)·론(論)을 말한다. 트리피타카(Tripitaka)라는 팔리어의 한역(漢譯)으로서 불전(佛典)의 총집성을 말하는 것이다. 삼장이란 부처의 설법[經]과 부처가 정한 교단의 규칙[律], 그리고...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1807년 제작된 나옹·지공·무학 등의 고려 후기 3대 화상의 진영(眞影). 본래 통도사 삼성각의 우측 벽에 지공화상[?~1363] 진영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나옹화상[1320~1376], 오른쪽에 무학화상[1327~1405]을 나란히 봉안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의 개혁파로 잘 알려진 승려들로서, 지공은 나옹에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838년(헌종 4) 경상도 감영에서 통도사에 잡역을 혁파해 준다고 발급한 문서. 조선시대 불교계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포함하여 많은 부문에서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건국 초기에 조선 왕조에서 사회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고 사원 소유의 전지(田地)와 노비를 압수하면서,...
-
1919년 3·1운동 전후 양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소년 단체. 양산청년회 등 청년 단체와 함께 양산 지역 주민들에게 애국 계몽 운동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근대적 소년 운동은 1921년 5월 1일 천도교에서 천도교소년회(天道敎少年會)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산의 소년 단체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문헌상 처음 등장한 것은...
-
양산시의 도심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커다란 돌들이 너부러져 있다. 산에서 굴러온 돌들도 아니다. 어떤 돌들은 축대 속에 끼워져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의 돌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돌들이 양산초등학교 주변에 모여 있다. 과거의 역사는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사료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며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있...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청년 운동 단체. 1919년 3·1운동 이후 각 지역별 청년 운동은 문화 진흥과 산업 진흥을 목표로 야학 운영, 토론회, 강연회, 풍속 개량, 체육 활동 등을 펼쳤다. 양산청년회는 1920년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 문화 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사회 운동 단체이다. 경상남도...
-
경상남도 양산시 강서동에 있는 조선 전기 국립 중등 교육 기관. 1397년(태조 6) 창건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불탔으나 위패는 당시 교임이었던 정호인이 솔밭 속에 숨겨 화를 면했다. 이후 여러 군수와 전교가 향교에 대한 책임을 맡으면서 중창 및 중건, 수리 보수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1985년에 군수 이두연이 대성전, 신문, 명륜당, 풍영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
-
조선시대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전통시대에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에 역과 원이 설치되었다. 역(驛)은 정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원(院)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 제공과 빈객을 접대하는 숙박 시설로 설치되었다. 우리나라 역참은 문헌...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외석리에 있는 조선 후기 대(臺). 조선 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오명환(吳明煥)이 만년에 건립하였다. ‘병풍 같은 바위와 개석이 있어 매양 이곳에 올라 소요 자적했다’는 제명(題名)이 있다. 병풍 같은 바위 위에 개석이 있고, 대에는 연구대(蓮龜臺)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다. 곳곳에는 나주오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위에...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재료·기교·양식 따위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결과물. 양산의 전통 문화는 불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양산 지역의 전통 문화를 대표하는 통도사에서는 전통 춤 예술을 계승, 발전시켜 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양산사찰학춤」 또는 「양산학춤」을 완성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이외에도 통도사의 범패, 「연등바라춤...
-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있는 의춘방씨 재실. 의춘방씨의 시조 방태경은 1452년(문종 2)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고, 문하찬성사상호군을 제수받았다. 1470년(문종 20) 2월에 서쪽 변경을 안정시킨 공로로 문종이 보국공신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하고 식읍을 내렸다. 67세의 나이로 타계한 뒤 조선 태종 때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충렬사에 제향하였다. 재...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위천(渭川) 지역은 동래 지역과 언양 지역을 잇는 중간 지역에 있던 지역으로 봉화산(249m) 밑의 지역이다. 위천은 원적산에서 발원하여 양산천에 합류하는 지류인데, 하천의 명칭이 지역의 명칭으로 쓰이는 것은 일반적이다. 위천산(현재의 봉화산)에는 과거 봉수대 자리였던 위천봉대가 자리하고 있다. 『신증동국...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유교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유적과 유물. 유교 유물 유적은 크게 유적 자료와 유물 자료로 나눌 수 있다. 유적 자료로는 서원, 향교, 사우, 누정, 정려, 비석 등의 건축물 등을 들 수 있다. 또 유물 자료로는 서원·향교 등에서 제사 의식 때 사용하는 신주(神主)와 제기, 유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문집과 가문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족보 등이 있다....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시 유산동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양산군지』에 따르면 윤산(輪山)은 유산리 앞들 가운데 있는 둥근 야산으로 일명 반월산(半月山)이라 한다. 지금의 양산지방산업단지 한전변전소 서쪽에 있는 산으로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祠)가 있었다가 해방과 동시에 없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40여 개의 찰방역 중...
-
고(故) 안종석 선생은 양산 향토문화 연구의 거목이었다. 성균관 부관장을 역임한 안종석가 1984년에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뒤 미망인 김순덕에 의해 발간된 『석헌집(石軒集)』(1992)에 수록된 그의 약력을 간추려 적으면 다음과 같다. 고 안종석 선생은 광복 후 박제상을 기리는 사당을 거금의 사비로 세움으로써 민족정신을 바로잡고자 했다. 1949년에는 협소한 소토초등학교를 사비를...
-
소노마을에 들어서면 그 입구 왼쪽에서 소계사를 만날 수 있다. 서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원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 서원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고 있다. 본래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잎을 지니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줄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변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거나 인품이 뛰어나고 오래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나무 숲 속의 소계서원은...
-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학성(鶴城). 세조의 원종공신인 수사 이종실의 5세손이다. 이겸수는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전공이 있었다. 1594년(선조 27)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대장으로 하는 왜적이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그 해 3월 5일 조정에서 그 진위를 탐정하고자 장희춘(莊...
-
신한균을 방문한 어느 봄날 저녁 신한균 사기장이 묻는다. “사기장이 뭔 말인지 잘 모르지요?” 이어서 “우리는 그거를 장인이라고 합니까? 명인이라고 합니까? 일본에서는 장인을 공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전에는 도공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믄 사기장입니다. 도공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즈그 마음대로 바꾼 말입니다.”라...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현재 황산역 내에 있는 정자로 옛 관리들의 휴식 장소였다. 일아라는 명칭은 한문공(韓文公)의 『승청벽기(丞廳壁記)』의 한 구절을 취한 것이다. 『양산군지』에는 일아정과 관련하여 조선 숙종 때의 명신 우암 송시열 기문(記文)이 기록되어 있다. 1630년(인조 8)에 찰방(察訪) 정백순(鄭百順)이 일아정을 창건하고, 그...
-
일본은 조선을 강제를 점령한 이후 각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양산도 그러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1931년 양산읍성을 해체하고 읍성의 동헌 터에 일본식 건물인 양산군 청사를 건축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고유의 읍성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동헌 자리에 있었던 의춘당, 동헌 아문인 경성루(警省樓)와 서쪽 누각인 춘설루(春雪樓)는 이제는 저 먼 기억속...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 있는 절터. 사찰의 창건과 폐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전에 의하면 임경사(臨鏡寺) 아래 임경대에서 매일 관원과 풍류객들이 풍악을 울리고 육류를 먹어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 순조 때 양산군수 이연상이 편찬한 『양산읍지』 불우조에 나오는 “군의 서쪽 황산 기슭 큰 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고 없...
-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이라고 칭한...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대성암에 있는 조선 전기 목판본 『입학도설(入學圖說)』. 『입학도설』은 조선 전기 유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이다. 『입학도설』은 제자 김반이 『속입학도설(續入學圖說)』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이 쓴 『천명도설(天命圖說)』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
이한을 시조로 하여 경상남도 양산시에 세거하는 성씨.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은 신라에서 사공 벼슬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오름으로써 세계가 번성하여 파조도 대단히 많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 선계에서 갈라진 파와 그 이후 갈라진 파를 합해 모두 123파이다. 임영대군 정간공(貞簡公) 이요의 후손이...
-
임진왜란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가 낙동강 변에 있는 양산 일대이다.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영남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양산 일대였다. 조선의 밀양부사 박진은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삼랑진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지역에는 작원(鵲院)이 있었는데 이곳은 낙동강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관문이었다. 물론 육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나가기...
-
경상남도 양산시에 속하는 법정동. 아리 또는 주진이라 하였다. 주진마을의 지형이 배[船]형국이고, 땅에 나룻배의 닻을 맸다 하여 처음에는 선진(船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삼한시대에는 우시산국(于尸山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우풍현(虞風縣)으로, 고려시대에는 흥려부(興麗府)라고 하였다가 다시 울산군(蔚山郡)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울산군 서면으로 했다가 1...
-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 속하는 자연 마을. 신기주공아파트 중간에 있다고 해서 중동마을이라고 한다. 동중동 마을이 속한 신기동은 본래 양산의 읍내면 지역으로서 조선 숙종 때 당시 마을 뒤에 여부사(余芙寺)란 사찰이 있어, 그 명칭을 따라 ‘여부’라 칭한 때도 있었으나, 마을이 새롭게 확장 발전됨에 따라 조선 말기에는 ‘우새터’, ‘아래새터’ 또는 ‘신기’라 불려졌다고 한...
-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지방관의 애향심을 보여주는 지명 유래담. 1996년에 편찬된 『하북면지』에 채록되어 실려 있다.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의 지산리와 초산리 지역의 명칭이 불리게 된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이다. 충정공 권발의 6대손인 권만은 1747년(영조 23)부터 1749년(영조 25)까지 양산군수로 재직하면서 양산군 내의 5개 봉산(封山:...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지산골 또는 지산이라 하였는 데, 진시황 때 서불(徐巿)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왔을 때 영지(靈芝)를 구한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입향조는 현재 평산마을에 정착한 김해김씨였다고 한다. 지산당 앞에 있는 묘의 입석에 ‘장사랑김해김씨함풍십년(將仕郞金海金氏咸豊十年)’이라 쓰여 있어 정착 시기는 대략 1800년경으로...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속하는 자연 마을. 진시황제의 신하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왔다가 이곳에서 영지(靈芝)를 구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입촌한 사람은 김해김씨였다고 하는 데, 그 기록이 묘지석(墓誌石)에 잘 나타나 있다. 본래 양산군 하북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7개 리가 8개 리로 개편될 때 구 초산리...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동일 조상의 후손들이 중심을 이루는 마을. 집성촌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주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하여 있으면서 중앙 정부의 관료층과 연관을 가지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형성된 씨족 집단의 거주 촌락이고, 거주의 지속성을 보여 일정 지역의 복수의 촌락들을 형성하여 상호 교섭을 가진다. 파(派) 단위의 거주 범위는 상당히 넓고 동성...
-
고려 후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충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아버지는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이다. 차원부는 1320년(충숙왕 7)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후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학자로서의 명성이 포은 정몽주나 야은 길재와 함께 높았다.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하게 되...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천주교는 로마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회로서 동방정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와는 구별되는 가톨릭교회를 말한다. 가톨릭이란 ‘보편적’, ‘공동적’, ‘일반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스스로를 ‘유일하고, 성스럽고, 공변되며, 사도(使徒)로부터 전래된 교회’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회가 전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
청안을 본관으로 하고 이제한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양산시 세거 성씨. 청안(淸安)은 충청북도 괴산군에 있는 지명으로 도안(道安)과 청당(淸塘)이 합쳐진 지명이다. 청안이씨(淸安李氏)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은 시호가 충원(忠元)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檢校侍郞)·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
1878년(고종 15) 이만도가 춘화당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며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춘화당 제영」의 내용으로 보아 이만도(李晚燾)[1842~1910]가 양산군수가 된 1876년(고종 13)으로부터 2년이 지나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이다. 이 「춘화당 제영」은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자 단식으로 생을 마감했던 이만도의 애민 정신을 읽을 수 있게 한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안...
-
고려 후기부터 1642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작성된 통도사에 관한 각종 문헌 자료. 「통도사 사적기(通度寺 事蹟記)」는 그 판본이 유통되고 있었으나,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통도사에 남아 있던 것을 옮겨 적어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하였다. 이마니시 류는 1906년 가을에 조선을 여행하면서 경주를 갈 때 물금역에 하차하여 통도사를 지나면서 통도사에 남아 있던 사본을 필...
-
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의 정문 문루. 향교는 유교의 성현(聖賢)을 제사하고 지역 사회의 인재 양성과 교화를 위해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 공립 교육 기관이다. 향교의 구조는 교육과 제례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강학하는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소인 동·서재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孔子)와 공자 제자 및 유현(儒賢)들을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동...
-
이예를 시조로 하고 이직강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양산시 세거 성씨.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옛 이름이다. 학성이씨의 시조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용양위사상호군(折衝將軍龍驤衛司上護軍)에 올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이예(李藝)이다. 이예의 선대는 고려조의 명문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충절을 지켜 울산...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의 하나로서 양산 예술혼의 뿌리이다. 양산의 전통 예술을 대표하는 「양산사찰학춤」도 통도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양산사찰학춤」은 신라 646년(선덕여왕 15) 통도사가 창건된 이래 불교대제, 영산재, 수륙재, 생전예수재, 종무대재 때 의례 행사무로 시작되어 통도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현대까지 전...
-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동에 있는 효자 정려각. 현효 정려각은 조선 숙종 때 인물 김려택의 효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다. 김려택은 조선 숙종 때 훈련원 판관을 지낸 김석일의 아들로서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다. 그 뒤 울주(지금의 양산시 웅상읍)로 이사하여 살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김려택의 효성이 각별하였는데 부친이 세상을 떠나 시묘를 할...
-
673년(문무왕 13) 원효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천성산에 창건한 사찰. 홍룡사는 673년(문무왕 1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의 하나로, 낙수사(落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조선 선조대까지 영남 제일 선원이었던 홍룡사는 천불전·관음전·나한전 등을 갖춘 천성산 제일의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 뒤...
-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조선시대 찰방역은 찰방(종6품) 1명이 관장했고, 역리들이 역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했다. 특히 중앙 직속 기관이었던 찰방은 역정(驛政)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세력 또한 막강해 양산 지역에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했을 뿐 아니라 군수(종4품)의 치정을 견제하는 역할까지 했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
-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주천(酒泉)에 관련된 이야기. 주천 전설은 샘물이 술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일례로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에 오준이라는 효자의 「효감천」 전설이 있고, 이희준[1775~1842]의 『계서야담』에도 「효감천」이 있다. 전승 지역만 다를 뿐 인물과 내용이 유사하다. 최상수가 1936년 7월 당시의 경상남도...
-
조선시대 조정융 등이 희청헌에서의 감회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읊은 칠언율시의 한시. 희청헌(憙晴軒)은 조선시대 양산 관아의 춘설루(春雪樓) 뒤편에 있었으며, 양산군수였던 조신준(曺臣俊)[1573~?]이 지었다고 전한다. 1. 조정윤의 칠언율시 조정융(曺挺融)[1598~?]의 「희청헌 제영」은 전란을 딛고 재건한 희청헌에서의 감회를 노래하였다. 7구와 8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