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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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Buryeongsa Temple Reflected Buddha on the Lak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성익 |
[개설]
불영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매우 오래된 사찰이다. 현재까지 많은 스님이 수행 정진하고 있는 사찰이면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비구니가 수행하는 사찰이기 때문에 특히 정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사찰 경내까지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풍부한 계곡의 물은 사찰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변화하는 것만이 영원할 수 있다고 했던가. 불영사는 지금도 꾸준히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 제일의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눈 푸른 납자(納子)들이 ‘내가 부처가 되고 중생이 부처가 되게 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는, 그래서 역동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한 사찰, 항상 구도자와 탐방객에게 꿈속의 사찰과 같은 현실의 사찰인 것이다.
[부처의 그림자 머무는 곳]
불영사는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하원리 122번지[불영사길 48]에 있다. 울진에서 봉화 방향으로 국도 36호선을 따라 태백산맥을 넘기 전 불영계곡이 시작하는 곳에 있다. 그야말로 기암괴석이 넘쳐나고 맑은 물이 흐르는 한국 제일의 절경, 명승 제6호로 지정된 곳이다. 명찰은 명산에 있는 법이다. 계곡이 아름다운 만큼 불영사도 이에 못지 않게 넉넉한 대지 위에 화려하면서도 아늑하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정갈해서 누추하지 않은 사찰이다.
불영(佛影)... 이는 부처님의 그림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불영사에는 부처님의 그림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면 불영사를 천 번을 다녀온다 하여도 부처님의 그림자는 볼 수가 없다. 직관(直觀)을 갖지 않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일반인에게는 세상의 것이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 빈 바랑 걸머지고 도는 나그네처럼 불영사를 찾으면 그야말로 자신이 부처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리라. 불영사는 원래 이름이 불귀사(佛歸寺)였는데, 『한국불교사찰사전』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의상대사가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에 들어가서 해운봉(海運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인 인도의 천축산을 옮겨 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또 그는 맑은 냇물 위에서 다섯 부처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내려가 살펴보니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큰 폭포가 있었다.
의상은 독룡에게 법을 설하고 그 곳에 절을 지으려 했으나, 독룡이 듣지 않았으므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독룡을 쫓은 뒤 용지(龍池)를 메워 절을 지었다고 한다. 동쪽에 청련전과 무영탑(無影塔)을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라고 지었다. 676년(문무왕 16) 의상대사가 다시 불영사를 향하여 가다가 선사촌(仙槎村)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구나’하면서 기뻐했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불영사를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고 하여 불귀사라고 불렀다.”
이 전설을 증명이나 하듯 불영사의 서쪽 산등성이에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작은 바위가 앞의 큰 바위를 향하여 인사를 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을 향하여 인사를 하는 형상이라 여기고 이 모습이 연못에 비추어져서 이름하여 불영지(佛影池)라 한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귀사(佛歸寺)가 보인다. 울진의 서쪽 40여 리 백암산에 있는데 의상이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영사에 관련한 문헌 자료는 매우 적고, 이러한 자료마저도 소재지에 관련한 것이 대부분으로 불영사의 초창기 역사를 명확히 밝혀줄 자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단지 불영사에 소장된 기문류(記文類)가 있으나 대부분 조선시대에 작성된 것이어서 초기 자료에 관한 것은 보다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불귀사의 절 이름에 관한 것으로 1630년에 새긴 ‘불귀사고적소지(佛歸寺古蹟小志)’라는 현판이 현재도 불영사에 전하고 있고, 후대에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이지만 1370년 자료인 ‘천축산불영사 시창기(天竺山佛影寺始創記)’라는 현판도 전하고 있어서 부분적이나마 불영사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불영사의 역사를 정리하면, 조선 태조 연간에 화재로 소실되고 소운법사가 재건하였지만,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대부분 불에 타고 1602년 인섬이 화주가 되어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앞에 승당이 건립되었다. 1600년대 후반에 들어 양성선사가 주석하면서 명부전과 향적전을 중수하여 불영사가 새롭게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유서 깊은 문화재]
불영사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지정된 문화재로 불영사 응진전[보물 제730호], 불영사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불영사 영산회상도」[1735년, 보물 제1272호], 불영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양성당 부도[1696년, 문화재자료 제162호], 불영사 불연(佛輦)[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 불영사 불패(佛牌)[1678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8호]가 있다.
지정된 문화재의 순으로 보면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기둥이 없는 통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을 한 구조이다. 정면의 하인방 아래에는 툇마루를 두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법당에 마루가 설치된 예로 봉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으로 팔작지붕을 한 양식이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은 최근에 제작하여 봉안하였는데 매우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겉옷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삼척 천은사 본존불과 협시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서쪽의 반야당 옆에 있는 극락전에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어느 시기엔가 대웅전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면서 원래의 삼존불을 극락전으로 이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불은 17세기 중후반기에서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양식으로서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크게 조각되고 겉옷인 대의(大衣)가 두텁게 표현되었으며, 팔각의 하대·중대·상대로 구분되는 좌대 역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단지 대웅전에 봉안되었을 때에는 석가모니로 불리었을 것이나 극락전으로 이전 봉안되면서 법당 이름에 맞도록 아미타불·대세지불·관세음보살로 명칭이 변경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전각 중에서 하나 주목되는 것이 있다. 현재 의상전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로 원래는 인현왕후의 원당(願堂)이었다. 원당이란 왕실의 복을 비는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이러한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통도사·선암사·직지사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찾아 볼 수 있다. 단순히 왕실의 복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왕손의 태를 사찰 인근에 묻고 이를 축원하는 기능도 맡아 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숭유정책 속에서 불교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기능이기도 하였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인경왕후가 죽자 왕비가 되었으나 장희빈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희빈에게 밀려 났다가 다시 복위되는 비운의 왕비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불영사의 스님과 가졌던 인연이 사찰 내에 있는 사적비에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 때문에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가 자결하려 하였으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저는 불영사에서 왔는데 내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궁희가 꾸민 사건이 발각되어 죄를 받고 왕비는 환궁하게 된 까닭에 불영사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하고 네 곳에 표를 세워 부처님의 은혜에 사례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원당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의상전은 불영사가 갖는 왕실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나말여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석탑 앞의 배례석이 있다. 석탑은 높이 3.2m이며 우주와 탱주의 비율은 2:1, 옥개받침은 4단이다. 배례석은 중앙에 연화문을 새겨 놓았는데 매우 정교하다. 또한 대웅전 앞의 석축 아래 좌우에는 거북이를 각 한 마리씩 조각하여 놓았다. 이는 대웅전을 지혜의 배라는 반야용선으로 상징화하고 이를 거북이가 지혜의 바다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거북의 머리와 목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는데 거북이를 제작한 기본적인 의도는 다르지만 북한의 수창궁에서도 보이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이다.
불영사는 조선시대 산간에 중창되는 가람 배치법을 계승한 사찰이면서도 이와는 조금 다른 배치법을 하고 있다. 가람 배치란 사찰을 구성하는 건물들을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중창되는 사찰들은 대체로 절 입구에 일주문(一柱門)을 세우고 조금 들어가서 중문(中門)인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짓고 더 들어가면 2층 구조의 누각을 지으며 이를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양쪽 옆으로 스님이 사는 승방을 두고 정면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존불로 모시는 대웅전이나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극락보전이 있는 배치법이 통례이다. 그런데 불영사는 이러한 가람 배치에서 일주문과 중문이 없을 뿐 누각부터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배치법을 사용하여 건축물을 지었다.
그러나 불영사는 이러한 축선의 건물 외에도 서쪽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있는데 응향각·명부전·의상전·응진전·칠성각·극락전·반야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는 불영사의 대지가 산을 등지고 앉아 비교적 동-서쪽으로 길게 평탄지를 이루고 있어서 동쪽을 불영사의 중심 구역으로 삼고, 서쪽에 있는 불영지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이를 에워싸는 형태로 각기 기능을 달리하는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중심 구역은 부처님과 승려가 기거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서쪽으로 각기 신앙화할 수 있는 전각들을 지어 조선시대에 보이는 통불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웅전의 예불에 관련한 일을 하는 승려가 기거하는 응향각(凝香閣),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하고 10왕을 봉안한 명부전(冥府殿), 불영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의상대사를 봉안한 의상전(義湘殿), 석가모니 재세 시에 수기 제자인 나한상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토속 신앙과 관련한 칠성 신앙의 칠성각(七星閣),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전(極樂殿), 승려가 수행하는 반야당(般若堂) 등이 있다.
[불영사를 노래한 시인]
불영사 입구에는 ‘단하동천(丹霞洞天’이라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다. 이는 신선이 노니는 그런 마을이란 뜻으로 바로 불영사를 말하고 있다. 아니 불영사 경내만이 부처님이 사시는 것이 아니라 불영계곡 구비구비, 모두 부처님이 사시는 곳이라 부처님의 세상이란 뜻이다.
경상남도 산청군에 있는 단속사(斷俗寺) 입구에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 쓴 글씨가 있는데, 사찰에서는 이렇게 대문격인 사찰 입구에 글을 새겨 놓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를 더하게 만들었다. 광제암문이란 많은 사람을 도와 이롭게 한다거나, 넓게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으나 모두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마음을 정제하거나 그렇게 살라는 뜻일 것이다. 불영사에는 많은 선비와 시인들이 찾아와 글을 남겼는데 조선 후기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불영사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부용꽃 천송이 절 둘렀는데/ 금탑봉 청라봉이 날아갈 듯 솟았다/ 전각 밑 용소에는 용이 숨어 있는데/ 동문에 쏘이는 빛 부처님 아니신지/ 계곡에 눈 녹은 시냇물은 폭포 이루고/ 이월 달 봄 구름 산허리 감았다/ 새벽녘 거닐 때 달빛 따라 가다가/ 좌망대 오르니 마음 맑아져 속심 씻긴다(芙蓉千朶化成圍 塔峀螺峰摠慾飛 殿角潭湫龍恍惚 洞門光景佛衣俙 一溪雪水騰銀瀑 二月春雲羃翠微 向曉步隨圓月去 坐忘臺上淡忘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