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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410
한자 龜岩里
이칭/별칭 봉곡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구암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구암리에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암리로 개편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암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3.17㎢
가구수 89가구
인구[남/여] 167명[남 82명/여 85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구암리(龜岩里)는 옛 이암방(耳岩坊)과 구암면 소재지였던 곳으로 구암면 사무소, 주재소, 산업 조합, 금융 조합 등이 있었다. 봉곡 마을에서는 갱정유도(更正儒道)를 창시한 강대성[본명 강향수(姜香秀), 아명 강기동(姜基東)]이 태어났다. 갱정유도회문산 금강암과 여분산에서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현재 청학동에서 신도들이 모여 살고 있다.

[명칭 유래]

구암리는 조선 시대에 이암방 또는 구암방(龜岩坊)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봉곡리(鳳谷里)와 둔기리(屯基里)를 병합하고는 구암면 소재지라는 이유로 구암리라고 하였다. 행정리로 봉곡리와 둔기리가 있다. 봉곡리는 원래 새실이라 하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봉황새가 집으로 돌아든다는 말에서 새실이라 하였던 것이 봉곡리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한때 이 마을을 사곡(沙谷)이라 하였는데, 평사낙안(平沙落雁), 곧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상으로 성곡리 쪽에 몇 가구가 사는 마을을 사곡이라 하였다가 훗날 전체 마을을 사곡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후반 고유 이름 찾기 운동이 이루어지면서 세 번에 걸쳐 마을 회의를 하여 다시 봉곡으로 바꿨다. 둔기 마을은 무이산 장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둔터우라 하였다. 마을 뒷산에 대장군봉이 있는데 당시에 군사들이 진을 쳐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1760년(영조 36)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 방리(坊里) 신증(新增) 편에 옥천군의 북방 12㎞[30리] 지점에 이암방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암방에는 18개 마을[里]에 543호가 거주하였으며, 1897년(고종 34) 방(坊)을 면(面)으로 바꾸면서 구암면(龜巖面)으로 개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사곡리와 둔기리가 구암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 총독부 관제가 제정되면서 면, 촌, 방, 사, 리, 부 등이 면급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구산리·구암리·성곡리·율북리·안정리·금천리·금창리의 7개 리를 병합하여 구암면으로 하였다. 1935년 군·면 통폐합 때 구암면 7개 리와 무림면 7개 리를 합하여 구암면의 ‘구(龜)’ 자와 무림면의 ‘림(林)’ 자를 합하여 구림면으로 개칭하고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북쪽으로 자래봉과 미금내들을 경유하며 운남리와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태봉과 댐머리 등을 지나 성곡리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백토 고개를 지나 구산리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곡리와 인접해 있다. 무이산(武夷山)[557.6m]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팔덕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팔덕면 태자 마을 뒤에 솟아오른 산이 태자봉(太子峰)이다. 이 봉우리에서 동북쪽으로 인계면구림면을 넘나드는 해발 350m의 귀야우재가 형성되고, 다시 북으로 물통골산[377.1m]이 솟아오른다. 더욱 북으로 가면서 뻗어 황독치(黃犢峙)[315m]가 되어 분지처럼 이룩되다가 서쪽으로 뻗어 솟아오른 것이 태봉(泰峰)[285m]이다.

태봉에서 서쪽으로 다시 뻗으면서 소쿠리 속처럼 아늑하게 형성된 마을이 봉곡 마을이다. 봉곡 마을 앞쪽으로 큰 들을 형성하면서 하천을 지나 둔기 마을이 자리 잡았다.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굴등, 구싯골 등이 있다. 들이 넓고 비옥해서 소가 일하기 좋은 지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새실 동쪽에 있는 산을 태봉(泰峰) 또는 트들봉이라 부르는데,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고 한다. 백토 고개, 응굴재, 원굴재 등의 고개가 있으며 절터골, 어덩굴 등의 골짜기가 있다. 뜰이 넓어서인지 미금내들, 모릿돌들, 사기막들, 산골들, 테미들 등 들 이름이 많다. 소하천으로는 미금천, 구암천, 오랭이천, 수박다리천 등이 있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구암리의 면적은 3.17㎢이며, 인구는 89가구, 167명으로 남자가 82명, 여자가 85명이다. 면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1.2㎞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블루베리와 조경목, 상추 등 특용 작물을 많이 재배한다. 국도 21호선, 지방도 729호선, 군도 9호선, 이도 210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봉곡 마을에서 둔기 마을까지 가는 당산 길도 있고 장터길, 새터웃길, 티메길, 넘언들길, 미금길 등 사방팔방으로 갈 수 있는 옛 길들이 있다.

구암리진주 강씨(晉州姜氏)갱정유도 창시자인 강대성이 태어난 곳이다. 청학동으로 유명한 갱정유도는 본래 구림면 봉곡리 출신 강대성이 창시하였다. 당초에는 일심교(一心敎) 교주였으나, 나중에 갱정유도로 이름을 개칭하였고, 구림면 운북리 질재골에서 도통하였다. 일심교가 큰 세를 떨칠 때는 전국에 교인이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청학동에선 제를 지내며 기리고 있다.

마을 동서남북에 느티나무 네 그루를 심어 약 400년 동안 마을 수호신인 당산나무로 모시고 매년 정월 첫 정일을 택해 제관을 정하고 마을의 평온과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제를 모셨다. 구암리 둔기 마을에는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당산나무가 있다. 이 당산나무에서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경에 당산제를 모신다. 의병 활동가로 양경학(梁景學)이 기록에 나와 있다. 양경학은 1883년(고종 20) 태어났으며, 구림면 구암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양윤숙[양춘영 장군과 동일 인물이라고 함] 의병대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13 현행화 [상세정보] 가구수, 인구 변경, [현황] 인구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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