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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452
한자 烽燧
영어공식명칭 Signal Fire
이칭/별칭 봉화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방문식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 통신 제도의 기록과 흔적.

[개설]

봉(烽)은 횃불, 수(燧)는 연기를 말한다. 봉수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전통 시대에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제도이다. 주로 적의 침입이나 내란 혹은 군사적인 소요를 중앙에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상에 나타난 군사적인 목적의 봉수는 12~13세기 고려 중기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봉수제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기원전인 주나라, 전한 시대(前漢時代)에 봉수가 있었다고 하며 당나라에 이르러 완전히 제도화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 때 이미 봉화를 사용하였고,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0년조에도 봉현(烽峴)을 비롯하여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의 기록이 나타나 상당히 오래전부터 봉수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의 확실한 봉수제는 고려 중기 1149년(의종 3)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曹晉若)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烽燧軍)에게 생활 대책과 감독 책임자를 배치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구분하였으며 변경과 해안 지방은 적의 접근과 위급한 정도에 따라 횃불과 연기의 수를 정하였다. 평상시는 1거(炬), 변방이 위급한 상황일 때 2거, 적이 침입하였을 때 3거, 적과 아군이 접전하여 전황이 급박할 때는 4거의 신호를 중앙에 보냈다. 또한 사신의 도착을 알릴 때도 봉화를 사용하였는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견문록인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관련 기록이 보인다. 즉, 송나라의 사신들이 배를 타고 흑산도(黑山島)에 도착하면 야간 항로 주변 산꼭대기에 있는 봉수소(烽燧所)의 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봉화는 순차적으로 밝혀서 임금이 있는 왕성에까지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봉수 제도는 조선시대 세종 대에 와서 좀 더 완전해졌다. 1419년(세종 1) 평시에 1거(擧)부터 적과 접전 때 5거에 이르는 거화법(擧火法)과 관계 요원의 근무 부실에 대한 과죄 규정(科罪規定) 등을 정하였다. 이후 1445년(세종 27) 봉수구 폐책(烽燧救弊策)을 논의하여 고려 이래의 전통적 봉수제를 바탕으로 세종 중기 이후 실제 운영해 본 경험을 모아 봉수제를 확립하였다. 이 내용은 『경국대전』 봉수조의 원형이 되었으며 봉수 시설, 책임자, 관리자, 처벌과 상, 수도와 국경 경계의 연락 체계 등을 유기적으로 정비하였다.

이후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1583년(선조 16) 이탕개의 난(尼蕩介-亂),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등에서 봉화를 못 올리고 파발(擺撥)로 대체되는 등 부침이 있었으나, 조선 말기까지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흥의 봉수]

시흥 지역의 봉수와 관련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안산군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안산군에는 봉화소가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오질애(吾叱哀)와 무응고리(無應古里)인데, 이후 무응고리는 정왕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각각은 오이도 봉수지(烏耳島烽燧址)와 정왕산 봉수지(正往山烽燧址)에 대응된다. 현재 두 봉수지 모두 도시 개발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관련 기록으로만 존재와 역할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먼저 오이도 봉수지는 군자면 정왕리 오이도의 가운데살막 북쪽 산봉우리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안산군 서쪽에 있었으며 “남쪽으로 무응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 성산(城山)에 응한다.”고 하였다. 정왕산 봉수지는 정왕산의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일대를 마을 주민들은 봉우재, 봉화산 등 봉수 제도와 관련된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확인된다. 유적은 1988년 상반기 명지대학교 박물관이 지표 조사를 수행하였다. 현재는 시화지구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산의 절반 가까이나 깎여 나가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정왕산 봉수지에 대한 기록이 오이도 봉수지보다 풍부한데, 1759년(영조 35)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안산군 봉수조, 1871년(고종 8) 편찬한 『안산군읍지』 봉수조, 1899년(고종 36) 편찬한 『안산군읍지』 봉수조에는 좀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옛 오질이도 봉수(吾叱耳島烽燧)를 정왕산 봉수(正往山烽燧)로 옮겼다.”며 “남쪽으로 남양(南陽) 해운산 봉수(海雲山烽燧)에 응하고, 북쪽으로 인천 성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안산군읍지』 봉수조에는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25리[약 9.8㎞] 떨어진 마유면 정왕산에 있는데, 남쪽으로 남양 해운산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 인천 성산 봉수에 응한다.”고 하였다. 『안산군읍지』 봉수조에 “…갑오년(甲午年)에 철폐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894년(고종 31) 정왕산 봉수가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시흥 지역의 봉수는 오이도 봉수와 정왕산 봉수를 주축으로 남쪽의 남양 해운산 봉수와 북쪽의 인천 성산 봉수를 이어주는 신호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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