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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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서귀포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 제주목사와 향리 세력이 제주 농민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펴다가 화전민, 특히 광청리(光淸里)에 거주하던 남학(南學)을 신봉하는 신자들 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농민 반란이다. 제주도에서는 19세기 들어와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 평안도 농민 전쟁의 영향으로 1813년 양제해(梁濟海)의 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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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대한제국 정부의 봉건적 수탈과 천주교 및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탈에 저항한 제주 지역의 민중운동. 전제군주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왕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1900년(고종 37) 내장원(內藏院)에서 봉세관(棒稅官) 강봉헌(姜鳳憲)을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세금을 무리하게 거둬들였고, 심지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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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속하는 법정리. 감산리는 조선 중기에 제주 고씨의 선조가 현재의 감산리 서동 묵은터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며,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감산리의 옛 이름은 감산이다. 산 모양이 귤[柑]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감산을 민간에서 신산악, 신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을 볼 때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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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 민란[신축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1901년 제주 민란은 토착 신앙이 전통 종교였던 제주도 민중들의 외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반감, 제주도 경제권을 둘러싼 토호 세력과 중앙에서 파송한 봉세관과의 갈등 등이 원인이었다. 1901년 1월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이 세금 징수로 민중들을 착취할 때, 천주교 신자인 최형순(崔亨淳)이 실무를 맡은 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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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에 거주했던 1862년 임술 제주민란의 주동자.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한 전국적인 민란의 영향과 지방관의 경제적 수탈로 제주도에서는 모두 세 차례의 민란이 일어났는데, 본관은 진주(晋州). 대정현 광천리[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사람인 강제검(姜悌儉)은 2차와 3차 봉기를 주도하였다. 이 농민봉기는 강제검의 난으로도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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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개항기 의병장 고사훈과 의병 김만석이 순국한 장소.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 고사훈[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승천’으로 개명함]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의병으로 나서면서 이름을 ‘병생’으로 개명함]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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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귀포 출신 의병.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출생이다. 고후삼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 세력에 의해 제주에도 일진회(一進會)란 친일 매국 단체가 조직되자 대정군지회의 회원이 되었고, 경찰 순사(巡査)로 근무하며 통감부(統監府)의 지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08년 5월경 민사소송 건에 연루되어 경찰에서 해임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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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에서부터 광복 이전까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의 역사.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지방 제도에 관한 칙령 98호가 이듬해인 1895년 5월 26일에 반포되었다. 이 제도 개혁에 따라 제주 지역은 제주부가 되었고, 제주부 관할 하에 제주군·정의군·대정군 3개군이 설치됨으로써 제주 지방 행정 체제는 1부 3군제였다. 그러나 1896년 8월 4일 ‘13도제’의 시행으로 제주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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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에서부터 광복 이전까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의 역사.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지방 제도에 관한 칙령 98호가 이듬해인 1895년 5월 26일에 반포되었다. 이 제도 개혁에 따라 제주 지역은 제주부가 되었고, 제주부 관할 하에 제주군·정의군·대정군 3개군이 설치됨으로써 제주 지방 행정 체제는 1부 3군제였다. 그러나 1896년 8월 4일 ‘13도제’의 시행으로 제주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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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의병 김만석의 묘. 제주읍 이도리 동광양 출신의 김만석은 고사훈이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에 이도리 광양의 조인관의 집에서 창의의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할 때 참가하였다. 당시 1909년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모두 10명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거사 날짜를 1909년 3월 3일[음력 2월 12일]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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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의 손자 나주군 김운발(金雲發)을 시조로 하고 김인충(金仁忠)을 입도조(入島祖)로 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세거하는 성씨. 나주김씨는 신라 경순왕계에 속하며 경순왕은 대보공 김알지의 28세손이다. 경순왕의 손자 김운발은 김알지의 30세손이 된다. 신라 천년사직이 고려에 이양된 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운발을 나주군에, 차자 김우발(金雨發)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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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제주민란을 일으킨 주동자. 1898년 제주민란은 일명 ‘방성칠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제주 지역은 서울에서 파견된 세리(稅吏)의 지나친 조세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하였다. 세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을 지도자로 하여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성 내의 관아에 몰려가 화전세·목장세 및 호포의 과다징수와 환곡의 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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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 민란[신축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1901년 제주 민란은 토착 신앙이 강한 제주도 민중들의 외래 종교 천주교에 대한 반감, 제주도 경제권을 둘러싼 토호 세력과 중앙에서 파송한 봉세관과의 갈등 등이 원인이었다. 1901년 1월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이 세금 징수로 민중들을 착취할 때, 천주교 신자인 최형순(崔亨淳)이 실무를 맡은 것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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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 민란 당시 민군의 대장. 1901년 제주 민란은 ‘신축 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하며 최근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민란이 발생했던 1901년 당시 제주도민들은 일본 어민의 어장 침탈과 서울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횡포, 왕실 세금을 거두로 내려온 봉세관의 무리한 세금 부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여기에 전통 신앙을 중시하는 제주도민과 외부 종교인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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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뒤로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서귀포 역사.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한국의 역사는 타민족 일제의 지배하에서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 시기 제주 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 차별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식민지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1915년 제주에는 도제(島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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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강우백(姜遇伯)·이재수(李在秀)·오대현(吳大鉉)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여 세운 비. 제주대정 삼의사비(濟州大靜三義士碑)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봉세관(捧稅官)의 부패와 일부 천주교도들의 행패에 맞서 1901년(신축년:광무 5) 5월 제주도민들이 봉기한 사건인 ‘이재수난’의 세 장두(狀頭)인 강우백·이재수·오대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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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안덕면 서광리에 있는 개항기 항일의병의 집결지. 1909년 2월 25일 의병장 추대와 함께 기병을 결의한 의병운동의 중심세력들은 격문을 작성하고 곧바로 오시(午時)를 기해 통발하였다. 격문에는 의병들이 먼저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대의명분을 분명히 밝히고, 각 지역에서 국권수호를 위해 총궐기하여 제주도민 또한 죽음을 불사하고 왜적을 격퇴할 것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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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민란[신축민란] 당시 대정군수을 지낸 문신. 1901년 제주민란은 ‘신축민란‘ 또는 ‘이재수의 난‘이라고도 하며 최근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민란이 발생했던 1901년 당시 제주 도민들은 일본 어민의 어장침탈과 서울서 내려온 관리들의 횡포, 왕실 세금을 걷기 위해 내려온 봉세관의 무리한 세금부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여기에 전통신앙을 중시하는 제주도민과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