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17
한자 朴文秀
영어공식명칭 Park Munsu
이칭/별칭 성보(成甫),기은(耆隱),충헌(忠憲),영성군(靈城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박문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3년 - 박문수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발탁
활동 시기/일시 1724년 - 박문수 세자시강원설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4년 - 박문수 삭직(削職)
활동 시기/일시 1727년 - 박문수 영남별견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박문수 분무공신 2등 책봉, 영성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730년 - 박문수 승정원도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31년 - 박문수 영남감진어사 발탁
활동 시기/일시 1737년 - 박문수 병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41년 - 박문수 어영대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49년 - 박문수 호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1년 - 박문수 예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2년 - 박문수 제주도로 귀양
활동 시기/일시 1753년 - 박문수 귀양에서 풀려남
몰년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박문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56년 - 박문수 영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56년 - 박문수 시호 ‘충헌’ 증시
부임|활동지 박문수 소유 정자 ‘송정’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박문수 묘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3길 78-42[은지리 산1-1]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고령(高靈)
대표 관직 병조판서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별서가 있었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 박장원(朴長遠)이고, 증조할머니는 윤원지(尹元之)의 딸 해평 윤씨(海平 尹氏)이다. 할아버지는 박선(朴銑)이고, 할머니는 참판 이후산(李後山)의 딸 용인 이씨(龍仁 李氏)이다.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항한(朴恒漢)이고, 어머니는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인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부인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증손녀이자 목사(牧使) 김도협(金道浹)의 딸 청풍 김씨(淸風 金氏)이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어 조카 박구영(朴久榮)을 양자로 삼았다. 박문수의 큰할아버지 박빈(朴鑌)의 사위가 경종의 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단의왕후와 박문수는 내외종 6촌간이다.

[활동 사항]

박문수는 1691년(숙종 17) 소론계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발탁되었다. 1724년(경종 4)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왕세제 연잉군[영조]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1724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직(削職)되었으나 1727년(영조 3) 영남과 호남에 흉년이 들자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使)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728년까지 활동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난[이인좌의 난]이 발발하자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이 되어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봉되었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박문수는 소론이었지만 영조의 동궁 시절 요속(寮屬)으로서 영조의 신임을 받아 탕평 정국 속에서도 꾸준히 등용되었다.

그리하여 40세인 1730년(영조 6)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고, 1731년(영조 7)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에 발탁되어 굶주리는 백성들 구제에 힘썼다. 1737년(영조 13)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741년(영조 17)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되었을 만큼 영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1749년(영조 25)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실무 관료로서 활동하면서 균역법을 정비해 가던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는 등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751년(영조 27) 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752년(영조 28)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인 1753(영조 29)년 풀려났다.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시작된 을해옥사(乙亥獄事)가 일어나 남인과 소론 인사들이 500명 넘게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갔고, 연루된 집안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역모자가 진술한 초사(招辭)에 박문수의 이름이 나와 박문수도 역적으로 거론되었지만 영조는 이를 무고(誣告)로 보았다. 박문수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며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이듬해인 1756년(영조 32) 병으로 사망하였다.

박문수가 세상을 떠나자 충신을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던 영조는 박문수가 생전에 정승이 되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 하며 박문수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박문수와 남양주의 인연은 다산 정약용의 5대조인 정시윤이 정계에서 물러나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현[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지은 임청정(臨淸亭)에서 비롯된다. 정시윤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나 박문수마현 지역을 유람하다가 임청정의 경치에 반해 사들인 뒤 ‘송정(松亭)’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주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박문수는 영조 연간 『각전각궁공상정례(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尙方定例)』 3권을 합해 『탁지정례(度支定例)』의 간행에 참여하였다. 박문수가 남긴 글씨로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에 있는 기념비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가 있다.

[묘소]

박문수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산1-1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28년(영조 4) 분무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1756년(영조 32)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 충헌이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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