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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941
한자 梁順龍
영어음역 Yang Suny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악인
출신지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성별
생년 1941년연표보기
몰년 1995년연표보기
본관 남원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활동한 호남좌도 농악의 명인.

[개설]

양순용은 양병철과 권일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남원양씨 용성군파 15대손이다. 박학삼에게 가락과 굿의 체계를 배우고 전라북도 순창 동계의 김문식에게 ‘부포놀음’을 배웠다.

[활동사항]

양순용은 1941년 임실군 필봉리에서 태어났고 13살 되던 해부터 박학삼 상쇠 밑에서 끝쇠를 치기 시작하여 14살에 필봉농악의 상쇠를 맡았다. 20살이 되던 해에는 순창 동계에 거주하며 인근 지역에서 뛰어난 상쇠라는 인정을 받아 걸궁굿 연합 상쇠를 맡았던 김문식에게 부포놀음을 전수받았다. 사람들은 양순용을 애기 상쇠라 했다.

당시 임실군 지역에서는 농악 연행이 성행하여 5일장마다 굿판이 형성되었으며, 당시만 해도 농악을 치는 마을이 많아 마을간 농악 경연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이때에 양순용은 필봉마을 주민들과 굿패를 형성하여 필봉 마을굿뿐만 아니라 여러 곳들을 돌아다니며 ‘소방서굿’ 등 각종 걸립굿들을 쳤다.

1959년 8·15 해방 기념 ‘임실농악경연대회’에서 임실군 강진면 이목리의 뜬쇠 김문식패와 문방리 송주호패 등과 경연하여 1등을 하였다. 그 이후로 양순용의 풍물 굿패는 임실군 지역뿐만 아니라 김문식의 활동 영역이었던 순창 읍내와 순창군 구림면, 정읍군 산외 등지로 ‘걸립굿’을 하러 많이 다녔다.

이후 양순용이 20대에 한쪽 눈을 실명하고, 굿패에 소속되어 있던 몇몇 사람이 가정 사정을 이유로 고향을 떠나게 되면서 풍물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양순용은 좌절하지 않고 홀로 풍장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시·군 농악경연대회가 많이 생겨서 이런 대회에 나가는 30~40명 단위의 시·군 농악패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 무렵에 양순용이 필봉마을 4H 클럽의 10대 젊은이들에게 풍장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순수하게 필봉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60여 명 정도의 필봉마을 풍물굿패가 구성되었다.

이후부터 이들을 주축으로 임실군 대표로 ‘호남농악발표회’ 등 각종 풍물굿판이나 경연 대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부터는 차츰 대학생들도 하나둘씩 필봉마을로 ‘풍장’을 배우러 들어오기 시작했고, 양순용은 다른 지역의 풍물굿 명인들과도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양순용은 개인 사정과 경제적 이유로 필봉마을에서 농악단 활동 유지가 어려워지자 활동 무대를 남원으로 옮겼다. 계기는 남원 삼동굿을 통해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양순용은 남원시 보절면 금다리 호동마을에서 필봉농악 전수 및 활동을 다시 이어가게 된다.

이로 인해 필봉마을에서 농악 연행은 잠시 주춤해졌으나 양순용의 계획으로 1987년 2월에 7년 만에 ‘제2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담당 관련자들을 비롯한 여러 전문 관련자들도 이 발표회에 참여하였다.

이 해부터 ‘서울 놀이마당’에서 해마다 두 번씩 필봉농악 정기 공연을 연행하기 시작하여 2006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8년 4월에는 다시 필봉마을에서 ‘제3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갖게 되었고, 그 해 8월에 마침내 ‘호남좌도 필봉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1-마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현재 필봉농악은 마을굿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결성된 필봉농악보존회를 주축으로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농악 전수 교육,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함께 매해마다 ‘정월대보름굿’과 ‘풍물굿 축제’를 개최하여 필봉농악 발표회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다채로운 축제 형식을 빌어 필봉농악 전승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양순용이 이끈 풍물굿패는 1974년도에 전라북도에서 주최한 ‘제1회 전북농악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였다. 1977년도에는 서울 국립극장에서 주최한 ‘호남농악발표회’에 전사종, 전사섭 등 우도 지역 명인들과 함께 양순용이 쇠잽이로 참가하면서 필봉농악을 전국에 알렸다.

1977년 6월에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차하’를, 1978년에는 다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하여 필봉농악이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8월에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발굴 보존 정책의 일환으로 이 마을에서 ‘제1회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 발표회’를 갖게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제주도에서 열린 ‘제2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호남좌도 임실 필봉농악단’이 장원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력이 밑거름이 되어 이후 본격적인 필봉농악 전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83년도에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 ‘남원 삼동굿’이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양순용을 ‘삼동굿’의 상쇠로 초청하였고,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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