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929
한자 柳明喆
영어음역 Ryu Myeongcheo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상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국악인
출신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상귀리
성별
생년 1942년연표보기
대표경력 대불대학교 겸임교수

[정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국가 무형문화재 제11-8호인 남원농악(호남좌도농악) 예능보유자.

[활동사항]

류명철은 1942년 4월 25일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상귀리에서 출생하였다. 1946년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전라북도 대표팀의 상쇠였던 류한준이 그의 부친이다.

1952년 부친인 류한준이 사망하고 나서 그의 부쇠였던 강태문이 상쇠를 맡게 되자 1957년 정월부터 강태문 상쇠가 이끄는 남원시 금지면 ‘독우물농악단’의 마당밟이에 농구로 참가하면서 농악에 입문하였다.

류명철이 농구를 통해 쇠잽이의 기능을 익힌 후에 상쇠로 처음 입문한 것은 18살 때인 1959년 남원춘향제의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다. 류명철은 청소년들로 구성된 농악단을 구성하여 성인 대회에 참가하였다.

2년 동안 강태문의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기량을 익힌 류명철은 이 대회를 통해 당시 최고의 장고잽이로 유명한 최상근의 눈에 띄게 된다. 한때 류한준패의 장고잽이였던 최상근은 이 무렵 류한준패와 같은 포장걸립패를 결성하기 위하여 인원을 규합하고 있었다.

최상근은 류명철을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의 포장 걸립패 치배로 발탁한다. 최상근 일행은 16명의 공연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61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금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활동 영역이 전국으로 확장된다.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의 주요 치배들은 류한준패에 소속되었던 치배들이 대부분이라 류한준패의 포장걸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 무렵 호남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확산되던 여성농악단은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의 강력한 경쟁자가 된다. 호남 동부 지역의 좌도농악만을 공연 레퍼토리로 삼았던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은 여성농악단의 활동으로 흥행에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3년 상반기에 ‘금산농악단 최상근 일행’이 해산되면서 류명철은 독우물농악단, 조산농악단, 천거리농악단 등에서 활동하던 남원 지역의 농악인들을 규합하여 1970년대 초 ‘남원농악단’을 창단하였다.

‘남원농악단’의 구성원들 중 김흥수, 정점식, 김광수 등 세 사람은 당시까지 활동하던 여성농악단의 소고잽이로 전속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고, 류명철은 여성농악단에서 강사와 찬조 출연자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는 호남 지역의 전문 농악인 집단이 해체되는 시기였고, 결국 1970년대 후반 류명철은 농악계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가사에 전념한다. 오랜 기간 농악에서 물러나 있던 류명철은 1994년 남원시에서 강습을 시작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여 199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4호 남원농악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남원시립농악단 부단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목포 대불대학교 전통연희학과, 광주 남부대학교 한국음악학과 겸임 교수로 있다.

[저술 및 작품]

2003년 남원농악의 전 과정을 담은 동영상 자료를 CD로 제작하였으며, 2006년 남원농악의 가락과 고사 소리를 CD와 녹음 테입으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2006년 10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남원농악의 모든 장단을 정간보와 서양 악보로 기록한 『남원농악의 장단』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남원시 시민의 장 문화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9.23 [정의] 내용 현행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4호->국가 무형문화재 제11-8호(문화재 승격 사항 반영)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