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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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朱烈 |
영어음역 | Kim Juy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병옥 |
성격 | 민주 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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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생년 | 1944년 10월 7일 |
몰년 | 1960년 3월 15일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출신의 민주 열사.
[개설]
김주열은 마산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되어 4·19혁명의 영원하고 유일한 상징 인물이 된 열사이다.
[활동사항]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재계(金在桂)와 어머니 권찬주(權燦珠)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누이가 둘 있고 아래로 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태종(金泰鐘)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함양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에는 금지동초등학교를, 1959년에는 금지중학교를 각각 6회로 졸업했다.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입학 시험이 가까워 오자 김주열은 1960년 초에 서울로 올라가 YMCA 고교 입시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다가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金光烈)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권유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당시에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계가 기울어 학비가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시를 치러야 했는데, 기우는 가계를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권유에서였다.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남원으로 왔다가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다. 합격자 발표일은 3월 14일로 공시되었으나 3·15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김주열이 3·15선거 당시 마산에 있게 된 이유다.
김주열은 3월 15일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남원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과 비리,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3인조, 5인조 방법은 물론 사전 투표와 선거 통지표 가려 주기 등 모든 부정과 비리가 동원되었다.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다. 당연히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 김주열과 김광렬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두 형제 중 김주열이 돌아오지 않은 채 행방 불명으로 처리되었다.
어머니 권씨가 마산으로 달려가 김주열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고향 남원의 첫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어머니가 귀향하고 있던 그 시간 11시경에 마산의 중앙 부두에 미국제 최류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오르고, 이 주검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 좌익 폭등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마산의 2차 의거가 시작된 것이다.
4월 11일 마산 2차 의거는 부산, 광주 등지에도 불을 지폈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한다. 그러나 정치 깡패들이 이 시위대를 급습해 수많은 학생들이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4월 19일 서울과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4·19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의해 죽고, 4월 26일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죽었다.
[상훈과 추모]
4월 11일 시신 인양으로 4·19혁명을 이끌어낸 김주열은 4월 14일 고향 선산인 남원시 금지면 우비산 자락에 묻혔으며,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