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
전라도 지역의 남도소리가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 전파·전승된 민요. 농부가는 본래 농부들이 논매기를 하면서 소박하게 불렀던 소리이다. 이후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으로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면서 점차 세련되게 다듬어져서 남도소리를 대표하는 한 가지가 되었다. 이후 농부가라 하면 전라도에서 남도소리로 불리는 농부가를 일컫는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논을 맬 때 부르던 소리가 독자적인 유행가...
-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의 공북문 성벽에 새겨진 글귀. 공북문 성벽 석각은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의 북쪽문인 공북문(拱北門) 서쪽 성기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가로 80㎝, 세로 25㎝ 크기의 석재에 ‘康熙十九年山陰馬兵中哨泗川昆陽河東丹城咸陽六官一哨’라고 씌어져 있다. 이는 진주성의 수축을 담당하였던 구역의 표시를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축성 기록을 살펴보면, “세...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생으로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이...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義妓).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
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
-
(1)소문리와 소촌역 문산읍의 소문리는 조선시대에 소촌역(召村驛)이 있었던 곳이다. 『여지도서』의 경상도 진주목 역원조(驛院條)에 의하면, 역의 책임자로 본래 역승(驛丞)이 있었으나 나중에 찰방(察訪)을 두었다고 한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에 소속되어 도로의 역참(驛站)을 관할하던 종6품의 관직자로, 일정한 구간의 간선도로를 단위로 찰방 또는 역승을 두어 이를...
-
진주지역 최초의 서양식 민간병원. 배돈병원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지역의 환자를 중심으로 기독교 전도 사업을 하기위해 1913년 11월 4일에 세워졌다. 배돈병원의 건립은 호주선교회가 진주에 들어왔던 구한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1910년 호주의 건축가 켐프가 병원설계도를 작성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당시의 공사업자는 일본인 토목기술자였으며 호주선교회가 세웠던 당시 옥봉리교회 옆에 근...
-
해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관습적으로 되풀이 하여 행하는 생활풍습과 의례.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오랫동안 살아가다보면 특정한 관습이 생기고 해마다 반복됨으로써 세시풍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시풍속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적인 조건, 역사적인 경험, 또 그 지역민이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인 특성에 따라 이루어지게 된다. 세시풍속은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 특징...
-
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
역은 전근대시대의 국가권력을 중앙정부와 지방에 효율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설치한 교통통신조직의 일종이고, 원은 고려·조선 시대에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식시설의 일종이다. 역(驛) 역은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제는 국가의 동맥으로서 군사·외교적 측면만이 아니라 교통·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에 있는 열부 밀양박씨의 행적을 기리는 비. 황기찬의 처 밀양박씨는 남편이 전라도 지방에 나갔다가 죽자 스스로 남편의 시신을 옮겨와 고향에 묘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일해 자식들을 훌륭히 키웠다. 그 열행을 기리기 위해 자손들이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함촌마을의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42㎝, 너비 52㎝,...
-
조선 중기 영남사림으로서 남명학파를 이룬 성리학자 조식. 조식(曺植)의 생졸년은 1501(연산군 7)~1572(선조 5)이며,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이며, 남명은 그의 호이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역사에 출현하는 데에는 역사적 전통과 지리적 특성이 바탕이 된다. 남명 역시 조선 초기 이후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이 형성해온 학문적 연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경상우도(慶尙...
-
조선 후기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기록한 일기. 『쇄미록(瑣尾錄)』은 조선 시대 선비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 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이담(李湛)의 아들이다. 1536년(중종31) 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었다. 다음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 봉양을 위해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7) 사성, 이듬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선...
-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큰 전투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
-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경상도 도둑 이야기. 정상박, 성재옥, 김현수가 1980년 8월 6일에 진주 명석면(鳴石面) 새마을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구비문학대계』8-4에 수록되었다. 경상도 도둑이 전라도로 원정 가는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고개에서 전라도 도둑을 만났다. 전라도 도둑이 구례(求禮)에 박과댁(朴寡宅)이라고 불리는 부자 과부...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이신(而信). 대제학을 지낸 정척(鄭陟)의 아들이다. 출생년은 미상이다.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1475년(성종 6)에는 홍문관부응교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폈다. 1479년 수찬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그 뒤 해주목사와 경기도경차관,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이때 해주목...
-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진주에서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제1차 전투.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에 침입한 이래 조선 전 지역에서는 관군의 유명무실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성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면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차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선과 일본의 전쟁과정에서 특히 진주에서 벌어진 제1차 진주성전투는...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
우리나라의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지방에서 처음 성립된 후 16세기에 전국적인 개설을 보게 되었고, 17세기 중엽 이후 수적인 면에서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대동법의 실시와 동전 유통의 확대, 농업의 상품작물 재배 증가 등과 함께 장시의 개설지역도 교통의 요지나 물화집산지가 아닌 외진 곳까지도 확대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장시가 5일장화 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농업생...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정자. 진주 수졸재는 1916년 하세진(河世鎭)이 건립한 정자이다. 하계현(河啓賢)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창건되었지만 재실은 불타고 부속 정자인 수졸재만 남게 되었다.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옥류수를 재실 서편 담장을 따라 안으로 끌어들여 맑은 물과 새소리를 완상하며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날렵하게 지었다. 당...
-
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 진주의 농민항쟁은 그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지주(地主)·전호제(佃戶制)가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차량 정비고. 일제 강점기 일본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풍부한 양곡과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하여 경전선과 호남선을 개통하였다. 1923년 경부선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과 호남선의 광주광역시 송정리를 잇는 경전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1925년 진주역과 함께 진주역 차량 정비고가 건립되었다. 원래 이름은 ‘진주역 기관구’였는데, ‘기관구’란 기...
-
절개와 풍류를 지닌 진주 기생들의 생활 모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문화상.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으로 인해 ‘남 진주, 북 평양’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張志淵)...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2동에 소재하는 화물터미널.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지인 진주의 화물수송체계 혁신을 위하여 1987년 11월 11일 설립하였다. 화물수송의 전문화와 체계화를 이루어 진주시를 비롯한 서부 경상남도에 위치하는 회사나 공공기관의 대형 화물을 전국 각지로 수송하고 있다. 상대2동 33-89번지[도동로 131] 대형화물 수송의 주요고객이 밀집되어 있는 상평공업단지 주변에 있...
-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소개된 것은 18세기 말엽이다. 당시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을 통해 시작된 중국의 선교사들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졌다. 천주교의 정착은 직접적인 선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들은 실학운동에도 자극...
-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 백정은 도살업·제혁(製革)·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하는 천민층으로 주로 삼남일대에 많이 거주하였다. 갑오개혁의 중요한 성과는 법제적으로 이들에 대한 신분제 해방을 가져왔다. 그런데 강고한 인습에 따른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잔존하는 등 이러한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도수규칙(屠獸規則)」 제정 등 각종 부가세는 이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