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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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원(閔愿) : 자는 흥중(興仲)이요,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판서(判書) 민심언(閔審言)의 후손이다. 문과에 올라 직장(直長)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면서 행실은 방정했으며 목표하는 것은 높으면서 뜻은 넓었다. 충주(忠州) 음성(陰城)으로부터 옮겨와 진주의 옥봉(玉峰)에 살았다. ○ 최원민(崔元敏) : 호는 죽계(竹溪)요, 본관이 삭녕(朔寧)이니 사간(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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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최씨(全州崔氏) : 열부(烈婦). 최운개(崔云凱)의 딸이요, 승사랑(承仕郞) 진양(晉陽) 정승업(鄭承業)의 아내다. 임진년에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항상 칼을 차고 스스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만일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써 죽음을 결단할 것”이라고 했다. 해를 넘겨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과연 왜적이 이웃 마을을 핍박하여 거의 모두 죽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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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河崙) :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해 중앙과 지방에 역임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질이 있었다. 태종(太宗)을 도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했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다. ○ 하연(河演) : 하윤원(河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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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효행 관련 고문서. 「권병천등상서」는 단성·거창·진주 등 경상우도 유생들이 하진태의 효자 정려를 위해 암행어사에게 올린 진정서이다. 매우 긴 글로 하진태의 효행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진정서를 접수한 어사는 사림의 공의를 인정하고 효행을 적은 원장(原狀)을 등서(謄書)하여 들일 것을 지시하는 등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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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에 전해오는 돌장석의 유래에 관한 전설.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冷井里)로 들어가는 입구에 ‘진주 북 20리’라고 새겨져 있는 돌장석이 있다. 이 돌장석은 조선시대 때 마귀할멈이 지팡이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전해오는데, 돌장석 설화는 돌장석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유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돌장석 설화는 진주시청 인터넷 홈페이지의 진주시 읍면동 홈페이지 내에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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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경상도 지방에서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의 영역이었으며 이것은 서부 경상남도에서 거창, 산청, 진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4세기경으로 편년되는 평면 타원형의 주거지의 분포 상황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가야의 영역이었던 낙동강 이서지역은 가야 후기에 이르러 영역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지방 통지조직 중 삼국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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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섬유를 생산하거나, 실크 등의 섬유를 원료로 쓰는 가공품을 생산하는 산업. 진주지역의 견직공업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은 없다. 전통적인 기법의 견직생산에 대한 기록은 구한말에 진주 인근의 산청지역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근대식 견직공장이 설립된 것은 1910년대이다. 1920년대에 추겸호가 동양염직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본인 오다나까가 오다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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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초전동에 있었던 공공의료기관. 경상남도 진주의료원은 경상남도에서 설립한 지방공사로 서부경상남도 도민과 진주시민에게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공공의료기관이었다. 경상남도 진주의료원은 지역주민의 건강증진과 지역보건의료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의학을 도입하고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인재양성 및 국민을 위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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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졸업하거나 이와 동등한 학력을 가진 자가 진학하는 중등학교. 고등학교의 분류는 교육과정에 따라 일반계와 실업계로 구분되며, 일반계와 실업계를 함께 운영하는 종합고등학교가 있다. 그 외에도 과학고등학교, 외국어고등학교, 예술고등학교 등의 특수한 목적으로 설립되어 운영되는 특수목적고가 있으며, 수업연한은 3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고등학교 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중견국민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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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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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빼어나 구경하기 좋은 명소. 진주는 자연환경적으로 남강이 굽이쳐 흐르고, 역사적으로 사천·남해·산청·함양·거창·합천·의령 등 경상남도 서부지방의 전통적 문화 중심지로서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인 진주시는 남해고속국도, 통영~대전간 고속국도, 경전선 철도, 사천공항 등이 입지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사적으로 경제·사회·문화·교육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다.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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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기차·배·비행기 등을 이용하여 사람이 오고 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일. 진주시는 동쪽으로 마산시 및 함안군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으로 사천시 및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 및 의령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진주시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이고, 교통의 결절지이다. 진주시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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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에 있는 기상 상태를 관측·조사·연구하는 정부기관. 서부 경상남도 내륙지방의 기상정보를 제공하고 기상재해로부터 지역민들을 보호하고자 설립하였다. 1968년 12월 19일에 진주농업기상관측소로 창설되었다. 1970년 7월 18일 부산지대 진주측후소로 개칭하였고, 1970년 7월 18일에는 산청 등 12개 분실을 신설하였다. 1978년 4월 15일에는 함양 등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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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진(金璡)이고,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1556년(명종 11)에 아우 김복일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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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생으로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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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남쪽의 통일신라[676~935]와 북쪽의 발해[698~926]가 양립하던 시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 북방에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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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오(聖五)·경오(景五), 호는 신암(愼菴). 아버지는 노이선(盧以善)이며, 어머니는 팔계정씨이다. 1861년(철종 12) 거창에서 노이선의 차남으로 태어나 안의에서 성장하였다. 기호(畿湖) 유림의 거장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 등을 사사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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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진주는 역사적으로 서부 경상남도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이고, 도로 교통의 결절지이다. 진주시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동서 방향으로 남해고속국도와 남북을 연결하는 통영~대전 간 고속국도가 교차하고 있고, 2번 일반국도·3번 일반국도·33번 일반국도가 통과하는 영남과 호남 간 그리고 중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교통 요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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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술로써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 보건의료는 사전적인 의미와 협의의 의미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아플 경우 그 병을 낫게 하여 다시 건강한 상태로 돌리는 의료행위만을 의미하지만 좀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의술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술을 시행하는 병원, 의원, 약국도 모두 보건의료기관에 속한다. 우리나라에 현대 의학이 도입된 것은 불과 1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구한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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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삼을 삼으면서 부르는 노래. 삼베일은 전국적으로 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고성, 진주,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합천 등지는 지금도 삼베 일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만큼 부녀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삼베일 소리를 전승시켜 오늘날도 불리어지고 있다. 거창 지역에서는 삼베일 소리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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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생산자로부터 재화를 구입하여 ‘최종 소비자 또는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할 자’에게 재화를 판매하는 사업. 경제상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 상업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그 개념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상업은 경제발전단계에 조응하여 변화·발전하여 온 사회적·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개념에 대한 완전한 정립은 명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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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전승되는 장례식 때 상여를 메고 가는 상두꾼들이 부르는 소리. 「상여소리」가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채록 당시 후렴이 수록되지 않았으나 거창(居昌) 지역이나 의령(宜寧) 지역처럼 풍악소리, 풍물소리의 음률적 후렴 형태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가면서 상두꾼이 만가(輓歌)로 메기면 다른 상두꾼이 받아서 후렴을 반복하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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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거창, 자는 사훈(士勳)이다. 진주 백곡리에 살았다. 기질이 헌앙(軒昻)하였고, 맑고 고고함으로 자신을 지켰다. 학문에 힘써 배우기를 즐겼다. 또한 뒤늦게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조금의 교만함도 없었다. 조식이 그를 칭찬하여 “이 사람은 천성이 맑고 고고하다. 아는 것과 식견이 통달하고 분명하다. 비록 시와 예를 아는 이름난 유학자라도 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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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단목리 담산고택 소장 효행관련 고문서. 「오응운등상서」는 효자 하진태의 포증을 건의하는 경상우도 유생들의 건의서이다. 하진태의 노모를 향한 지극한 효행을 기리고 정려를 받기 위한 상서문은 하진태의 생존시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오응운, 최상갑, 정운현 등 진주 일원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정서를 올린 일종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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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의 문신, 의병. 조선 1860년(철종 11) 서울에서 태어나 1889년(고종 26)부터 3년간 선전관 벼슬을 지냈다. 이 무렵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자 벼슬을 버리고 국권 회복을 꾀하던 중 1906년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고 의병에 투신, 의병장이 되어 육남소모장(六南召募將) 칭호를 받았다. 이후 진주에 거주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1907년 김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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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국권강탈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교통·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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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홍보(弘甫), 호는 삼도(三島). 아버지는 임희중(任希重)이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급제,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 현감 박광전(朴光前), 능성현령 김익복(金益福), 진사 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와병중이던 박광전 대신 의병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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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전준창(全准昌)의 조카이다. 1728년(영조 4) 정희량이 일으킨 무신란에 숙부인 전준창, 아우 전덕징(全德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거창에서 반도들과 싸워 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전준창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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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란(戊申亂) 때의 의병. 본관은 경산(慶山). 자는 군거(君擧)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의병을 일으켜 반도들과 거창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양무원종공신에 올랐고 함께 싸운 아들 전성징(全聖澄)과 조카 전덕징(全德澄)에게도 각각 벼슬이 내렸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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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곤양.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진주정씨에서 분적한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중시조이다. 좌찬성에 추증된 정호(鄭浩)의 아들이다. 초명은 무수(茂壽)이나 1586년(선조 19) 무과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62년(명종 17) 출생하여 1622년(광해군 14) 60세로 별세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1590년 경상우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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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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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갖는 유한한 존재라는 자각에서 기인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믿는 절대자에게 의탁하여 현세에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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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지방에서 처음 성립된 후 16세기에 전국적인 개설을 보게 되었고, 17세기 중엽 이후 수적인 면에서 크게 증가하였다. 당시 대동법의 실시와 동전 유통의 확대, 농업의 상품작물 재배 증가 등과 함께 장시의 개설지역도 교통의 요지나 물화집산지가 아닌 외진 곳까지도 확대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장시가 5일장화 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농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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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13년(1862) 2월 14일 경상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 농민항쟁. 진주의 농민항쟁은 그동안 누적된 삼정문란과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엄격한 신분제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지주(地主)·전호제(佃戶制)가 근간을 이루고 있던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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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초전동에 있는 농산물 도매시장. 농산물의 유통구조 개선과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질서 확립을 통하여 신선한 농산물을 적기에 공급하고 적정가격을 유지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보호하고 나아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1995년 12월 29일에 진주농산물도매시장 건설 기본계약을 체결하고, 실시설계 용역에 착수하였다. 1996년 7월 15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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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서민금융기관. 무진(無盡)이란 일정한 계좌수와 급부 금액(給付金額)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부금을 납입한 부금자(賦金子)에게 1계좌마다 추첨·입찰 등의 방법에 의하여 일정 금액을 급부하는 제도였다. 1914년 말 당시 서울에는 137조(組)의 무진강이 있었으며 무진구수(無盡口數)는 1,738구였다고 한다. 또한 1921년 7월 말 무진회사는 77개소에 이르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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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부터 정부수립 후인 1949년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그동안 시행해오던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고, 그 아래에 336군(郡)을 설치하는 획기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부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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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포진지. 진주성 포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로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다. 1607년(선조 40)에 김태허(金太虛)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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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진주시는 동쪽으로 창원시와 함안군, 서쪽으로 하동군, 남쪽으로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 산청군·의령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부 경상남도의 거점 도시로, 2005년 10월 경상남도의 혁신 도시로 선정되었다. 경위도상으로 동경 127°53′ 52″~128°22′ 21″인 수곡면 원계리 동월마을에서 이반성면 발산리 내동마을까지이며, 북위 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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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장대동에 소재하는 시외버스터미널.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지인 진주의 교통체계 혁신을 위하여 1974년 11월 준공하였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리모델링 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진주시 중심부의 장대동 96-1번지[남강로 712]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 남강이 2차선도로를 사이로 접해 있고, 논개로를 통하여 마산·부산 방면, 남명로를 통하여 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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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진주의 사찬(私撰) 지리지. 지리지는 수록된 공간 범위에 따라 전국지인 여지(輿誌)와 지방지인 읍지(邑誌)로 나눌 수 있다. 또 지리지를 편찬한 주체에 따라 국가기관에서 만든 관찬(官撰) 지리지와 개인이 편찬한 사찬 지리지로 나누어진다. 전국 단위의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 이후 활발하게 편찬된 읍지는 전국 지리지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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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가 있는 진주의 도시적 구역. 읍치(邑治)란 고려시대 이후 확립된 군현제도에 의하여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治所)가 있는 도시적 구역으로, 흔히‘읍(邑)’혹은‘읍내(邑內)’라고 부르는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양지(晋陽誌)』 등에 기록된 건치연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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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성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성씨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고증할 수 없다. 시조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고려 때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이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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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의 옛 지명 진주는 가야 지역으로 거열성(居列城)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문무왕 3년(663) 2월에 거열성을 공취하여 거열주(居列州)라고 하였다. 신문왕 5년(685) 봄에 처음으로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높여 청주(菁州)라 하고 대아찬 복세(福世)로 하여금 청주총관을 삼았다. 「삼국사기지리지」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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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한국서예협회의 진주지역 지부. 진주와 인근 남해·하동·산청·함양·거창·합천·의령지역의 서예인들이 모여 민족예술과 서예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서예가의 권익을 옹호하며 서예의 국제적 교류와 서예인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1989년 3월 19일에 한국서예협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서예가들이 모여 진주지회 창립총회 결성대회를 개최하여 설립하였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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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까지의 한국전쟁 기간 중 진주지역에서 벌어진 사건. 한국전쟁은 민족의 비극으로서 우리 사회에 큰 피해와 흔적을 남겼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원인, 수행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중대한 쟁점이 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 주체를 둘러싼 논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전통주의설과 수정주의설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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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윤경(潤慶). 호는 송암(松菴). 장무공(莊武公) 황윤(黃潤)의 8대손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때 의병장이 되어 적을 거창의 소사평(素沙坪)에서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무신란은 청주 출신의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