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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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필(崔琦弼) : 본관이 전주(全州)이다.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더니 계사년(선조 26년, 1593)에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왔다.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가 임금이 피난한 곳으로 계문을 올리니 본주의 판관(判官)을 삼았다. 성이 함락되어 순절했는데 계해년(영조 19년, 1743)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고 창렬사(彰烈祠)에 모셨다. ○ 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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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한림(翰林: 예문관 검열) 강흘(姜仡)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도순성장(都巡城將)의 직책을 맡아 진주성을 지키던 황진(黃進)의 부장으로서 빛나는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올랐으며, 그 공으로 인해 자손들은 대대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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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부사 강우복(姜遇福)이다. 전라도 순천 출신의 무사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강희복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잠시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가, 다시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군표(軍標)를 ‘비(飛)’자로 삼고, 남원을 공격하였다.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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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에 있는 서원.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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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창렬사(彰烈祠) 내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등에게 내린 사제비. 김시민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면오(勉吾)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의 공방전 끝에 적 30,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시켰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김시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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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아버지는 진사 김언침(金彦琛)이다. 1573년(선조 6)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 받아 군기시주부가 되고, 그 뒤 용안현감과 강원도, 경상도의 도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의 자격으로 정치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실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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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순절한 의기(義妓). 본관은 신안(新安). 아버지는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다.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혹은 충청병사 황진(黃進)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3년 6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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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진경(眞卿).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官民)이 흩어짐을 보고, 같은 고향의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합세하여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지만 사양하고 자신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무를 정돈하며,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면서 군의 사기를 높였다. 1593년(선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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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 진주는 가야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1896년(고종 33년)에는 전국을 13도로 개편할 때 진주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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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晋州城) : 지금의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이라 하다가 고려시대 이래로는 촉석성 또는 진양성이라 하였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의 첫 축성 내력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초기에는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5년(1379)에 석성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조선 선조 24년(1591)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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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목 관아의 기녀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왜적에게 함락되던 계사년(1593) 6월 29일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의암, 義巖)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순국의 여인. 논개의 사실을 맨 먼저 기록한 이는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양주 서산에 숨어 지내다 광해군 복위를 꾀한다는 무고에 얽혀서 아들과 함께 서인 정권의 손에 죽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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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 진주성 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순국한 장졸들을 기려 지어 내려준 제문. 1833년(순조 33) 3월 11일 임금이 우병사(右兵使) 안광찬을 보내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의 넋에 제사하도록 유시하고, 아울러 문열공 김천일(金千鎰), 무민공 황진(黃進), 충의공 최경회(崔慶會), 충의공 장윤(張潤)에게 각각 제문을 지어 내려 제향토록 하였다. 그리고 양산주를 비롯한 12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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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조직하는 자위군.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침을 많이 받아 고려·조선 시대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의병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란의 의병과 조선 말기의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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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막료로 있었는데,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청하자 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부하들이 잘 따르지 않았으나,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강화하고 사졸과 고락을 함께 하니 사람들이 점차 이에 복종하였다. 1593년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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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인언(仁彦)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호협하여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83년(선조 16) 북도병마사 휘하의 군관이 되어 이제신(李濟臣)의 반란을 평정했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다. 1593년 4월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경상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아장(牙將)이 되어 선봉에서 적장을 사살하여 적을 퇴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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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큰 전투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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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명보(明甫). 아버지는 선전관 장응익(張應翼)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키는 팔 척이며, 특히 힘이 뛰어났다. 평소 유학에 뜻을 두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하였다. 여러 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활쏘기와 말 타기에 전념, 1582년(선조 15) 무과에 급제하여 북도 변장을 제수받았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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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진주성을 중심으로 1592년에 싸운 이래 두 번째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전투. 1592년 10월에 조선군과 왜군이 제1차로 전투를 벌인 결과 조선군이 왜군을 대패시킨 이래 왜군은 이를 만회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도 알려진 이 싸움에서 제1차 진주성전투와는 정반대로 조선군은 왜군에 대패하였다.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이래 1년 동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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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낙이(樂而). 아버지는 진사 진복명(陳福命), 어머니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의 딸이다. 또 문인으로 이름을 떨친 진우(陳宇)가 그의 형이다. 1519년(중종 14) 출생하여 1568년(선조 1) 49세로 별세하였다.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검열·대교·정언·이조정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형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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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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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인물들을 기리는 전적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국한 인물들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에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499-1번지 촉석(矗石)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43m이며 너비는 0.92m, 두께는 0.21m이다. 비신은 수성암(水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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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혼들을 위무하기 위해 세운 단.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1592년 10월)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비롯한 아군 3,000여 명이 왜군 2만여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 때에는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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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서 전승되는 창열사(彰烈寺) 중수와 관련한 설화. 창열사 중수 전설은 특정 지역을 한계로 하는 지역적 전설이며, 역사적 사실로부터 성립하고 성장한 역사적 전설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에서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다루어진 소재였다. 귀신담은 민담에서는 신이담(神異談)의 일종으로 널리 전승되는 소재이다. 사실 이러한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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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전주.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출생년은 미상이다.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발라 일찍이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봉사가 되었다. 이후 진주부관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살며, 젊은 유생들과 함께 학문과 도의를 강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지휘하여 1593년(선조 26)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성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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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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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의 5대손이며, 좌의정에 추증된 황윤공(黃允恭)의 아들이다. 1550년(명종 5)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 일생을 무장으로서 활약하였다. 평소 인품이 중후하고 절개가 남달리 굳었으며, 힘세고 날쌨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