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7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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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鍊 |
영어음역 | Heo Ryeon |
이칭/별칭 | 소치,허유,허모란,수치(叟痴),노치(老癡),칠십노치(七十老癡),팔질노치(八耋老癡),석치(石癡),연옹(蓮翁)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옥 |
[정의]
조선 말기의 문관이며 서화가.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 관지(款識)에는 수치(叟痴), 노치(老癡), 칠십노치(七十老癡), 팔질노치(八耋老癡), 석치(石癡), 연옹(蓮翁) 등을 사용했다.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水墨山水畵)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로 개명(改名)하였다.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1568~1662]의 후손이다. 아버지 허각(許珏)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완산 이씨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큰아들 허은(許溵)에게 화업을 물려주려 하였으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을 잃은 후 뒤늦게 4남 허형(許瀅)의 재능을 발견하여 화필을 전수하였다.
[생애]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지는 못하였다. 28세 때인 1835년에 허련은 전라남도 해남 연동에 있는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에 가서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빌려 몇 달에 걸쳐 모사해 보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그림 그리기에 정진하다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처를 유람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활동사항]
허련은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이듬해인 1840년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몇 차례나 제주도를 왕래하며 스승을 모시고 그림수업을 계속하였다. 김정희를 통하여 당대의 명사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허련과 교유를 가진 인사들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를 비롯하여,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과 민승호(閔升鎬), 김흥근(金興根), 정원용(鄭元容),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민영익(閔泳翊) 등이 있다.
36세 때인 1843년에는 김정희의 소개로 전라우수사 신관호(申觀浩)후에 신헌(申櫶)으로 개명)의 막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고, 39살 되던 해에는 신관호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영의정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다.
41세 때인 1848년 헌종의 배려로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림회시 무과에 급제하여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42세 때는 대궐에 들어가 헌종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바치기도 하였다.
[저술]
저서로는 『몽연록(夢緣錄)』(일명『소치실록(小癡實錄)』), 『운림잡저(雲林雜著)』, 『운림유록(雲林儒錄)』이 전한다.
[작품]
허련은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 미불(米芾), 원나라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청나라 석도(石濤)의 화법을 배웠다. 그리고 김정희의 서풍도 전수받아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여 19세기에 김정희를 따랐던 많은 화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총애를 받으며 남종문인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이다.
허련은 산수, 인물, 매, 죽, 노송, 모란, 파초 및 괴석 등을 모두 잘 그렸다. 산수에 특히 뛰어났고,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허련의 회화 중에서 산수는 황공망과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독필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의 독특한 색감에서 개성을 보인다. 인물화의 경우 김정희의 초상을 비롯한 화보풍의 고사 인물을 잘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선면산수도」를 비롯하여 「방예운림죽수계정도」, 「방황자구벽계청장도」, 「하경산수도」, 「추강만교도」, 「산교청망도」, 「동파입극도」, 「노송도」, 「노매도팔곡병」, 「모란도」, 「채과도」, 「괴석도」, 「고목죽석도」, 「묵란도」, 「석란도」, 「완당선생초상도」 외 다수가 전한다.
[묘소]
허련의 묘소는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원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소치 허련이 생전에 그림을 그리면서 살았던 운림산방은 1981년 전라남도 지정기념물 51호로 지정되어 새롭게 단장되었다. 생전에 허련이 기거하던 안채와 사랑채, 화실 뿐 아니라 총면적 28,740㎡에 연건평 2,579㎡의 경내에는 영정실, 소치기념관, 진도역사관 등이 세워져 있어 허련에서 시작된 근대 진도 화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으면서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조선 말기 한국의 남종문인화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이를 근대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방손인 의재 허백련 등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 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 호남 남종문인화의 종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