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T06011 |
---|---|
한자 | -家族-成長期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
집필자 | 심재석 |
동김녕에서 출생
고춘화는 동김녕에서 태어났다. 당시 동·서김녕이 따로 있었는데, 바다도 동, 서김녕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석거리는 서김녕에 있었다. 그 곳에 사람들이 많이 다녔는데,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과 고깃배, 여객선이 들어오는 포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녕에는 소주를 담아 파는 술도가가 있었다. 제일 오래된 수퍼로는 예전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 중간에 위치한 ‘퐁낭수퍼’가 있다.
그리고 김녕에서 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특산물은 소라이다. 소라는 바다가 오염이 되어도 잘 나오는 편이다. 생활용수로 필요했던 물은 개웃샘물에서 길어다 먹었다. 물을 길어 올 때는 물허벅을 사용했다. 개웃샘물은 물때에 따라 들고 나고 했는데 물맛은 짜지 않았다. 목욕은 청굴이라는 용천수가 나는 곳에서 했다.
살기 어려워서 건너간 일본 생활, 귀국하여 ‘물질’
고춘화는 1940년, 13살에 일본 오사카에 건너갔다. 거기서 공장 일을 했는데, 전구 소켓, 콘센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사출되어 나온 소켓 뒷마무리 작업을 하고 재봉일도 했다. 공습이 많아져서 공장을 그만두고 군납 들어가는 설탕을 구입해서 다시 파는 장사를 하면서 연명했다. 그러다가, 쌀, 고구마 말린 것, 설탕 등으로 판매하는 물건을 바꾸었다. 이런 장사는 주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했다. 그렇게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본에서 다들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
그러다가 20살 다 되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다시 물질을 배우기 시작해서 25살에는 거제도 장생포에 원정 가서 물질을 하기도 했다. 그때 돈으로 65만 원을 주고 김녕에 650평짜리 밭을 샀다. 그때부터 남의 일도 도와주고, 밭일도 하고 물질도 하고 해서 자식들 다 키웠다.
사람들이 많았던 비석거리, 서김녕 포구
일제시대에는 일본에서 직접 오는 배가 서김녕포구에 들어왔다. ‘군대환’이라는 여객선이 있었는데, 일본 가는데 3~4일 정도 걸렸다. 오사카까지 가는 배였다. 일본 사람들이 김녕에 절반이었고 학교 교장도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노예처럼 부렸다. 농사지은 것 할당 받은 만큼 공출해서 걷어서 가려고 일본 사람들이 있었다. 밭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공출을 했는데 다 주고 나서 먹을 것이 없어서 쑥, 톳을 썰어서 쌀에 섞어서 밥을 해 먹었다. 일본 사람들은 아주 무지막지했다.
바다 속 동김녕, 서김녕
2007년이면 김녕이 하나로 통합된 지 햇수로 7년이다. 해녀들은 통합 후에도 동김녕과 서김녕으로 바다 밭을 서로 나누어서 각자의 경계는 침범해서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동김녕 해녀는 서김녕 바다에 안가고, 서김녕 해녀도 동김녕 바다엔 안 간다. 7~8월에는 천초(우뭇가사리), 톳 작업을 같이 하는데 소라, 전복은 아직도 따로 작업한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바다의 경계는 서부두 가기 전에 있는 소여를 경계로 해서 동서 김녕 바다를 나눈다.
밭은 서김녕, 바다 속은 동김녕이 최고
고춘화는 이렇게 말한다. “예전엔 서김녕 살림살이가 나았지.” 김녕에서도 식당이나 가게는 서김녕 쪽에 많았다. 예전엔 서김녕이 살기가 좋았다. 왜냐하면 서김녕에는 토질이 좋은 밭이 많았다. 그 시기에 동김녕에 사는 사람들은 일본에 들어간 친척들을 만나러 일본에 왕래하면서 일본에서 벌어온 돈으로 밭을 많이 개간했다. 하지만 동김녕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수입이 서김녕보다 대충 곱절은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김녕 바다가 훨씬 더 해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재일교포들이 동김녕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은 비록 사는 곳은 일본이지만 고향 김녕을 위해서 기부를 많이 했다. 재일교포들은 마을회관 건립에 도움을 주고 친척들에게 밭을 사서 임대를 해줘서 농사지어 먹게 해주니 동김녕의 여건이 좋아졌다. 그렇게 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였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던 때부터 동김녕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해녀가 많아 약국이 많았던 김녕
예전엔 김녕에 약국이 많았다. 해녀들은 물질을 할 때 약을 먹는다. 고춘화는 아직도 물질을 할 때마다 약을 먹는다. 그녀는 43세 때 일본으로 물질을 하러 가기도 했다. 고오지껭(高智縣)이라는 곳이었다. 일본어업조합에서 잠수 일을 할 사람들을 모집해서 갔다.
일본에서는 주로 우뭇가사리하고 오분자기를 채취했다. 일본에서는 남자도 물질을 한다고 한다. 그 곳에서는 잠수 일을 하는데 수입은 월급제는 아니고 잠수를 해서 수확하는 만큼 돈을 쳐주었다. 그 지역 바다는 파도가 높아서 한 달에 10일 정도밖에 일을 못했다.
일본에서 처음 입은 고무 잠수옷 - 냄새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
일본 가는 길은 제주에서 부산까지 가서 부산에서 아리랑호를 타고 고베(神戶)까지 가서 고베에서 연락선을 갈아타고 사곡까지 들어갔다. 거기서 다시 차로 갈아타고 갔다. 내 나이 44살에 일본에 갔는데 그 당시엔 누구에게도 물질 하나는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고무로 된 잠수옷을 주었는데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 주로 뇌선, 사리돈, 구심 2알 정도 먹고 일을 했다. 예전에 고무 옷을 입기 전에는 약을 먹진 않았다. 고무옷을 입으니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잠수를 하면 잠수병이 나서 약을 먹는다고 하는데, 실제 고무 냄새를 억제하고 수압으로부터 느끼는 압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해녀들은 약을 먹는다고 한다.
고춘화는 25살부터 물질을 했다. 처음 배울 당시에는 고무옷을 안 입고 일했는데 그때는 약을 먹지 않았다. 고무옷을 입고 일하면 5~6시간 일을 할 수 있지만 예전엔 30분밖에 못했다. 일하는 시간은 늘었지만 그만큼 체력 소모가 많고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예전엔 배가 항상 옆에 있으면서 배 위에서 쉬기도 하고 갯가에서 쉬기도 했다. 일본에서 일을 하면서 들어올 때 고무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 조합에서 고무옷을 1벌씩 새 것으로 마련해 주었다.
한평생 물질하면서 하루도 노는 날은 없었어
물질 한 지는 약 56년 정도 되었는데, 하루도 노는 날은 없었다. 바다에 물질을 안 나갈 때는 밭에 나가서 일했다. 여름엔 녹두·깨·조·콩을, 겨울에는 양파·마늘을 재배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서 소일거리도 하였다. 밭일이 많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서로 도와주었다. 요즘엔 동네일뿐만 아니라 한라산 주변에 있는 골프장에 일을 하러 가기도 한다. 골프장에서는 하루에 36,500원씩 받았다.
내 기억 속의 30년 전 김녕
김녕에서는 여자가 물질을 안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가 김녕으로 시집오기를 싫어했다. 김녕에 시집오는 사람들은 월정, 동복에서 오는데, 다 물질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쌀은 육지에서 많이 들어온다. 보리나 조는 김녕에서도 농사를 지었다. 김녕의 골목길은 아주 좁았다. 자식들이 차를 가지고 다니기 좋으라고 올레를 넓혔다. 집도 19년 전에 새로 양옥으로 지었다. 올레에서는 예전에 애들이 놀지는 않고 넓은 공터에서 공차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