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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76
한자 仁同張氏
영어음역 Indong Jangssi
영어의미역 Indong Ja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시기/연도 1605년(선조 38)연표보기|1609년(광해군 1)연표보기|1636년(인조 14)연표보기
성씨시조 장금용(張金用)
입향시조 장윤태(張允泰)|장보한(張輔漢)|장철(張澈)

[정의]

장금용을 시조로 하고 장보한 등을 입도조로 하는 제주의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때 삼중대광에 올라 신호위 상장군을 역임했고, 장금용(張金用)의 아들 장선(張善)이 고려 문종조에서 금오위 상장군을 지냈다. 그 후 자손들이 본향지인 인동현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인동으로 삼게 되었다.

[입향경위]

① 장윤태(張允泰)는 시조 장금용(張金用)의 21세손이다. 1605년(선조 38) 경주부윤으로 재직할 때 당쟁에 휘말려 환관의 모함으로 제주에 유배되었다. 제주목 봉개리에 정착하여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② 장보한(張輔漢)은 시조 장금용(張金用)의 23세손, 중조 장백(張伯)의 8세손이다. 1609년(광해군 1)에 영창대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를 둘러싼 폐모론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녹도에 유배중인 형 장기한(張起漢)을 만난 후 제주에 낙향하여 제주 애월포에 정착하였다.

③ 장철(張澈)은 시조 장금용(張金用)의 23세손으로 1604년(선조 37)에 한양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였고 판교사감서(判校事監書)를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제주목 고내리에 피난 입도하였다. 입도 후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여 해은(海隱) 선생이라 일컬어졌다. 하가리(下加里)를 설촌하였다.

[현황]

제주도에 세거하고 있는 인동장씨는 태상경(太常卿) 장백(張伯)의 8세손인 장보한(張輔漢)의 후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인동남산파(仁同南山派)와 진가파(眞佳派) 및 종파 등이 살고 있다. 인동장씨 종파는 제주입도조 장철(張澈)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3월 3일 묘제를 지낸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8.18 [연원] 수정 <변경 전>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태사공 장정필(張貞弼)의 원손으로 <변경 후>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이용자 의견
장** 상장군계(장금용계) 인동(옥산)장씨 후손 입니다.
우리 시조인 장금용 할아버지가 장정필 후손이라는건 사실과 다르고 입증되지 않은 유언비어입니다.

인동의 현재지역인 구미에서도 이미 수정되어있는데 여기는 오류가 방치되고있군요
확인후 수정바랍니다.
  • 답변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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