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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42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sida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제주의 역사. .

[개설]

조선 시대 제주는 독립성을 상실한 채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제주는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중앙 정부에 의해 과중한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특히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했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 500여 년간 제주 인구는 5만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의 해산물 진상, 한라산 곳곳에서 생산되는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중앙 정부에 저항하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제주]

조선이 개창된 이후 중앙 정부는 1392년(태조 1)에 제주 향교를 설치했고, 1394년(태조 3)에 우마적을 작성했으며, 1404년(태종 4)에 노비적을 작성했다. 또한 1408년(태종 8)에 공부(貢賦) 정하기 등과 같은 정책 시행을 통해 제주도에 대해 강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아울러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제주 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를 수용하여 1416년(태종 16)에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수령으로 제주목에는 목사[정3품],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특히 제주목에는 제주 목사의 부관에 해당하는 판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관권과 토착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나면서 중앙 정부는 토관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주의 유력층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여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삼아 회유했다. 당시 재경사족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고봉지(高鳳智)와 그의 아들 고득종(高得宗)이었다.

고득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2회, 일본 통신사로 1회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는 등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 전기 제주 교육을 담당한 대표적인 관학 교육 기관으로 제주 향교·정의 향교·대정 향교가 있었으며, 이들 향교들은 문묘를 중심으로 한 교화 기능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교육 기능을 담당했다.

또한 대표적인 사학 기관인 서원에는 국가가 공인한 사액 서원으로 귤림 서원삼성사가 있었다.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재 양성 및 향촌민 교화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전기 제주는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 데 비해 잡역·잡세가 많아 도민이 져야 할 역(役)이 매우 많았다. 특히 이중 도민들이 가장 꺼렸던 역으로는 소위 6고역(苦役)이라 부르는 목자역·과원직·선격역·답한역·포작역·잠녀역이 있었다. 따라서 도민들은 이러한 고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상도 해안에 정착하기도 했다.

13~16세기에는 왜구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호소, 봉수와 연대를 설치·정비했다. 그러던 중 1555년(명종 10) 6월에 제주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60여 척의 선박에 분승한 왜구들이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 을묘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에 제주에서는 더욱 튼튼한 방어를 위해 9진성을 설치하고, 25봉수(烽燧)와 38연대(煙臺)를 정비했다.

조선 전기 제주사에서 목장사(牧場史)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제주사가 곧 목장사인 셈이다. 15세기 초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국영 목장[10소장]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는 의정부-병조-사복시-전라도 관찰사-제주 목사-감목관[제주 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마감-군두-군부-목자로 이어지는 마정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도 목장에는 일반적으로 4,000~1만 필 내외의 말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국영 목장의 우마를 훔쳐 팔아먹는 우마 도적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들을 색출하여 평안도로 집단 이주시켰다.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섬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유배지였으며, 조선 시대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 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 운반, 감귤이나 말 등의 공물 운반, 과거 응시나 장사 등을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일본·오키나와·안남 등지에 표류하기도 했다.

당시 표류인들의 견문은 『표해록』으로 전해져 주변국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실례로 1477년(성종 8)에 귤 진상을 위해 한국 본토를 향해 출항했던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태풍을 만나 유구국에 표류함으로써 유구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국인의 제주 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국인들은 남동풍·남서풍이 불어오는 여름에 표착하였다. 대부분 중국·일본·유구국·안남국 사람들이었으나, 네덜란드인 J. J. 벨테브레[한국 이름은 박연, 1627], H. 하멜[1653] 등 서양인들이 표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기의 제주]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산마장 개척자인 김만일(金萬鎰)이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제주에는 1601년에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 발생했고, 호남원병이 폐지되고 말았다.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은 1589년 정여립 사건에 가담했던 소덕유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말을 산다는 구실로 청포(靑布)를 갖고 길운절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일으킨 사건이다. 호남 원병은 본래 제주 방어를 위해 전라도에서 제주에 파병된 군인들로, 군인 수의 감소로 인해 제주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제주]

조선 후기 제주도에는 조선 전기와 같이 1목 2현 행정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이하는 면리제(面里制)로써 수령[지방관]을 통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관청 조직은 수령과 그 예하 조직으로서 6방 체제의 이청(吏廳), 군사기구인 장청(將廳) 및 지방 행정의 보좌 기구인 향청(鄕廳)으로 삼분되었다.

그 밑에는 면리임(面里任)과 최하 단위인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연결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와 고역 등으로 출륙하는 도민들의 수가 증가되면서 조정에서는 제주도민들의 출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1629년(인조 7)부터 출륙 금지령[1629~1823]을 내리기도 했다.

1813년(순조 13) 12월에 제주인 양제해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변란을 도모했다. 조선 후기 제주 지방군은 아병(牙兵)[제주 방어영의 대장을 수행하여 부대의 후미를 경비하는 친병]과 마대(馬隊)[마병],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의 수취 체제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곡물을 부과하는 조세인 전세(田稅), 제주영에 소속된 영둔전에 대한 세금인 영전세, 산전(山田)을 새로 일구어서 세금을 거두는 가경세, 그리고 장세미·화전세 등이 있었다.

제주도에는 예외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정 1인당 매년 전미(田米)[좁쌀] 5되씩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받았다. 제주인들은 요역과 군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환곡(還穀) 운영에 따른 폐단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환곡 운영을 위해 사창(司倉)[군량미의 비축과 진휼 재원을 보관]과 민고(民庫)[진휼 목적으로 환곡 대여와 수취를 통해 운영]를 설치·운영했다. 17세기 중엽의 『탐라지』에는 제주목에 제주사창·동별창[별방]·서별창[명월], 정의현에 정의사창, 정의 서별창[서귀], 대정현에는 대정사창 등 6개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제주도 내의 환곡 제도는 부실하게 운영되었다. 제주 고을 수령들은 자비곡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민고를 설치·운영했는데, 진휼창·보민창·고마고·목자고·견역고·장세고 등이 대표적이다. 18세기 말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육지에서 쌀을 사다가 구휼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도 제주도는 여전히 유배 지역이었다.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었던 사람은 주로 제주성 내에 안치되었으며, 대정현에는 광해군 때의 정온, 헌종 때의 김정희, 정의현에는 광해군 때의 김덕룡, 인조 때의 원종, 제주목에는 중종 때의 김정, 명종 때의 보우, 인조 때의 광해군, 숙종 때의 송시열·김춘택, 고종 때의 최익현·김윤식·박영효 등이 유배되었다.

[조선 말기의 제주]

제주도에 있어서 19세기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시기요,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였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태동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했던 농민들의 울분이 민란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도 1862년 강제검·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에는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주동한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신축 천주교란]이 발생했다. 특히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함대, 일본 함대까지 끌어들여 한때 제주도에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19세기 말엽 제주도에 대한 일본 어업의 침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한·일간에는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과 조일 통어 장정(朝日通漁章程)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일본 어선들이 제주 근해에 나타나 조업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고,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집단 항의를 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불** 1813년(순조 13) 12월에 제주인 양제해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변란을 도모했다. 이 대목은 이강회의 탐라직방설 시말을 통해 보면 모변이라는 그간의 정설은 이제 바로잡아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단순한 등소모의가 모변으로 누명씌워진일인 걸로 이미 논문도 정리된 것으로 압니다. 살펴주세요 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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