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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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靑年聯合會 |
영어음역 | Jeju Cheongnyeon Yeonhaphoe |
영어의미역 | Jeju Youth Associta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동전 |
[정의]
일제 강점기 제주 지역에 있었던 사회주의 단체.
[설립목적]
제주 청년 연합회는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한 청년들에 의해 제주 지역의 청년회를 하나로 연대시키고 전국적 조직인 제주 청년 총동맹과의 연합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25년 9월 23일 설립된 제주 청년 연합회에는 가파청년회·모슬포 청년회·온평 청년회·서귀포 청년회·함덕 협성 청년회·신촌 청년회·화북 청년회·제주 청년회 등의 단체가 가입하였다. 집행 위원으로는 김한정·오대진·고은삼·송정옥·김석호·김형계·강원진·김병훈·김유돈·김태민·홍순일·강창보·유성백·한상호·이신호 등이 선정되었다.
상무 위원으로는 서무부 위원에 홍순일·유성백, 교양부 위원에 강창보, 사회부 위원에 김태민, 조사부위원에 한상호 등이 선정되었다. 실무를 관장하는 상무 위원은 신인회 소속의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이 대부분 장악한 것으로 보아 1925년 이후 제주 지역의 청년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제주 청년 연합회는 서울 청년회가 장악하고 있던 전남 청년 연맹과 연결되어 활동하였다. 제주 청년 연합회는 1926년 8월 23일 제1회 정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당면한 문제로 제기된 조선 사회단체 중앙 협의회의 가맹과 조선 민흥회의 후원을 결의하였다.
조선 사회단체 중앙 협의회와 조선 민흥회는 정우회 선언 이후 ML계가 적극적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자 이에 대항하고자 서울 청년회에 의해 조직되거나 후원된 단체이다. 그러므로 제주 청년 연합회는 서울 청년회의 입장에 동조하여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
제주 청년 연합회의 강령으로는 첫째 ‘우리들은 제주 청년 운동의 조직적 통일을 기함’이며 둘째 ‘우리들은 자주적 교양과 단결적 훈련을 기함’이다. 발기 단체로는 모슬포 청년회·협성 청년회(함덕)·조천 청년회·신촌 청년회·화북 청년회·제주 청년회 등이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제주 청년 연합회에 가입하였던 모슬포 청년회와 가파 청년회는 1925년 11월 7일 안인보 청년회와 연대하여 대정 청년 연맹을 창립함으로써 대정 지역 청년 운동과 소년 운동을 지도하여 나갔다.
신좌면의 경우 청년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매우 두드러졌다. 함덕 협성 청년회에서는 1925년 12월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인류 해방의 제일보는 술의 굴레에서 벗어남에 있다’라는 표어 하에 금주 선언문까지 만들어 대대적인 금주 운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함덕 협성 청년회는 노동 야학을 개설하여 무산자의 아동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지역 출신 청년인 고종건과 김시훈 등이 야학 교사를 담당하여 가르쳤다.
조천 청년회에서는 1926년 5월 1일 노동자의 기념일을 맞아서 신좌 문고의 개관식을 가지고 독서를 통한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신좌면의 청년 단체들은 앞의 대정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6년 6월 24일 ‘운동선상의 통일을 기하고 보조를 일치시키기 위하여’ 신좌 청년 연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신좌면의 조천 청년회를 비롯하여 신촌 청년회·함덕 청년회·북촌 청년회·신흥 청년회 등이 가맹하였다. 구좌면에서는 1927년 6월 19일 구좌 지역의 통일적인 청년 단체 연합 기관으로서 구좌 청년 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 청년 연합회는 단순한 청년 운동의 결집체가 아닌 제주도의 제반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조직으로 건설되어 기존 청년 운동 단체의 고립적인 계몽 운동에서 벗어나 중앙 조직과 연결되어 사상적으로 체계화된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