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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231
한자 趙觀彬
영어음역 Jo Gwanbin
이칭/별칭 국보(國甫),회헌(悔軒),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진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유배인
성별
생년 1691년(숙종 17)연표보기
몰년 1757년(영조 33)연표보기
본관 양주
대표관직 호조판서|예조판서|대제학|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제주도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조태채(趙泰采)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 부사(府使) 심익선(沈益善)의 딸이다.

[활동사항]

1714년(숙종 40) 증광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15년(숙종 41) 검열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고 수찬·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 45) 승지로 특채되었고, 1720년(숙종 46) 대사간·대사성·승지를 거쳐 1721년(경종 1) 이조참의에 올랐다. 1723년(경종 3)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에 화를 당한 아버지에 연좌되어 흥양현(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에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풀려났다.

이후 호조참의·이조참의·강화유수·대사성·의금부사·호조참판·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 재임 중 신임사화를 논핵하였다. 1727년(영조 3)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자 노론 4대신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 등이 죄적(罪籍)에 있으므로 의리상 취임할 수 없다고 삭제를 상소하였다.

그 해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 강경파를 파면하고 소론을 정권에 참여시킨 정미환국 때 파직되었다. 1731년(영조 7) 대사헌에 있으면서 다시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하였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적인 감정으로 대신을 논척하였다는 죄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 대정현 북문 김호의 집에 귀양지를 정하고 유배 생활을 하다가 1732년(영조 8)에 풀려났다. 1736년(영조 12) 도승지에 임명되고, 1740년(영조 16) 호조참판·예조판서를 지냈다.

1742년(영조 18)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뒤, 1744년(영조 20)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의 불화로 면직되었다가 우참찬·홍문관제학에 다시 기용되었다.

1745년(영조 21)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공조판서·형조판서·강화유수 등을 거쳐 다시 수어사(守禦使)가 되어 남한산성에 군량을 저장할 것을 청해 시행하게 하였다.

1753년(영조 29) 대제학으로 죽책문(竹冊文)의 제진(製進)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함경남도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함경남도 단천으로 이배되었다. 1753년 풀려나와 이후 좌빈객(左賓客)·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철저한 노론 계열로 아버지의 신원과 포상 추진에 일생을 보냈다.

[저술과 작품]

저술에 『회헌집(晦軒集)』20권과 1747년(영조 23)에 왕이 농부들이 수확하는 광경을 친히 보고자 그 장소에 거둥하였을 때 만들어 바친 악장(樂章) 2수가 수록된 『관예악장문(觀刈樂章文)』이 있다. 왕명으로 박문수(朴文秀)·김성응(金聖應)·김상로(金尙魯) 등과 함께『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을 편찬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강***** 조관빈의 외조는 沈益 이 아니라 沈益善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틀렸는데 그것을 옮겨 온 것 같아요. 저는 후손입니다.
  • 답변
  • 디지털제주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사항은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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