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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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承禹 |
영어음역 | An Seungu |
이칭/별칭 | 계현(啓賢),하사(下沙·夏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夏史). 아버지는 화서학파와 교류하던 지평의 선비 안종응(安鍾應)이다.
[활동 사항]
안승우(安承禹)[1865~1896]는 동향의 화서학파 학자인 이근원(李根元)에게 배우다가 이근원의 스승인 유중교(柳重敎)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장담(長潭)에서 강학하던 유중교가 별세한 이후로는 유인석(柳麟錫)에게 제자의 예를 닦았다. 1894년(고종 31) 여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하는 갑오왜변 이후 의병을 일으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을미년(1895) 말 단발령이 내려진 후, 장담에서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일어 의병을 일으키거나 망명하거나 자결하자는 결의가 있었는데, 안승우는 의병 노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동향의 이춘영(李春永)이 의병을 일으키자 적극 동참하고 장담 선비들을 가담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춘영·김백선(金伯善)을 중심으로 한 지평의 포군 부대가 제천으로 와서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한 후에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로서 제천과 영서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필희 의진이 단양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붕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유인석을 적극 추대하여 대장으로 받들었고, 유인석이 호좌의진을 세운 후에는 전군장으로서 충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일본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는 전사한 이춘영을 대신하여 중군장으로서 호좌의진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안승우는 스승으로 섬겼던 화서학파 선학들이 남긴 경구들을 외고 실천하려고 하였는데, 의진 내에서 가장 강경한 주전론자로서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였다. 단발령이 취소되고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의 지시가 있었을 때 많은 의병 부대가 해산하였고, 호좌의진 내에서도 타협적인 움직임이 있었으나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관군이 제천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면서 전쟁에 쓰이는 물자를 대대적으로 징발하여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패배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아직 의에 죽지 못한 사람’으로 일컬으며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사를 추천하는 주장에 대하여는 의병에 필요한 것은 대의(大義)뿐이라고 단언하고, 방패나 무기를 만드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으며, 휴가를 청하는 군사들에게는 “잠시라도 자리를 떠났다가 ……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을 자리를 얻어 옳게 죽는데 밖에 있다가 홀로 죽음을 면하게 된다면 어찌 낭패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주장을 펼쳐 의진 내부에서 원망이 없지 않았다.
1896년 5월 25일 관군이 제천을 점령할 때 방어진이 무너졌으나, 작전 지역이던 남산에서 끝까지 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을미의병 기간에 호좌의진에서 전사한 ‘육의사(六義士)’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