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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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음역 | Yeoksa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역사와 문화.
[개설]
전통 시대 제천 지역은 제천과 청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지역 사회는 삼국 시대 이래 정치·경제·문화적인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후 1980년 제천시로 통합되면서 지역 사회는 뚜렷한 정체성을 각인시키면서 활동 무대를 점점 확장하고 있다.
[선사 시대~남북국 시대]
제천 지역은 강줄기를 따라 혹은 점말동굴로 알려진 동굴 유적에서 보듯이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가 삶을 영위해 온 곳이다. 청동기 시대의 수많은 고인돌과 함께 인골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인 주목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삼국 시대 제천은 접경 지역으로서 많은 투쟁의 장이 되었다. 주변의 철산지와 물류의 핵심인 남한강 물길을 확보하려는 3국의 이해가 서로 부딪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의 흔적을 알려 주는 많은 옛 성터와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 시기까지 제천 지역은 오랫동안 제천과 청풍이란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최초의 행정 구역 이름은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알려진 내토(奈吐) 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다. 훗날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 내제군(奈堤郡)으로 바뀌었고, 관할에 청풍현 등을 두었다.
[고려 시대]
내제는 고려 전기 제주(堤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성종(成宗) 때는 ‘의천(義泉)’ 또는 ‘의원(義原)’이라는 별호를 받았으며, 중원도(中原道) 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는데,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제주는 원주목에, 청풍은 충주목으로 갈라서 속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제주와 청풍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은 12세기 이후였다. 이전까지는 지방관을 따로 파견하지 않고 지역의 유력자인 향리가 충주목사나 지원주군사(知原州郡事)의 일정한 통제를 받으면서 조세와 부역, 소송 등 행정 업무를 맡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언급된 토성(土姓) 집단이 바로 지역 사회의 실질적인 운영자들이었다. 청풍현은 뒤에 지역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충숙왕(忠肅王)의 왕사(王師)가 되자 청풍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시기 전반에 걸쳐 제천 지역 사람들은 여러 차례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거란군이 쳐들어올 때는 박달재에서 큰 전투를 겪기도 하였고, 몽골의 침입 때는 청풍과 충주 쪽에서 맞섰다. 고려 후기 왜구들이 쳐들어와서 수난을 겪은 적도 있었다. 이 과정에 지역 사회는 큰 변동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만, 때로는 중앙군의 활약에 힘입어, 혹은 토착 농민군이 중심이 되어 외세를 몰아 낼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오늘날의 제천 지역이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이다. 1413년(태종 13) 제천현과 청풍군은 나란히 충청도의 50여 고을에 속하게 되었고, 이웃한 단양·영춘과 함께 사군(四郡) 또는 내사군(內四郡)으로 일컬어졌다. 이처럼 제천과 청풍 지역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고을이면서도 주현(主縣)과 영현(領縣)의 관계로 얽히기도 하고, 별개의 행정 구역에 따로 속하기도 하면서 역사를 이어 왔다.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이었지만 5소경 중 북원경(北原京)과 중원경(中原京)에 이웃하였던 만큼 고급문화도 수용할 수 있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제천의 의림지(義林池)가 전체 경작지의 70% 이상을 관개하고 있을 정도로 제천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선진적인 농업이 시도되고 있었다. 당시 농업 선진 지역으로 불리던 경상도의 관개율이 17% 정도에 머물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놀랄 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농경지의 면적은 넓지 않았지만 제천에서 이뤄졌던 벼농사는 이웃의 어느 지역보다 선진적이었다.
조선 시기에 들어 지역에서 겪은 가장 극적인 경험은 작은 고을에 불과했던 청풍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한 일이었다. 현종(顯宗) 즉위년 왕비의 본관지라는 이유로 제천현보다도 작은 고을이던 청풍군이 밀양이나 남원 같은 큰 고을과 동급인 도호부로 승격된 것이다. 이로써 청풍은 명읍(名邑)으로 여겨져 명사들이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하는 곳이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고급문화가 전해졌음은 물론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제기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나 권섭(權燮) 같은 시인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고급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다. 대체로 동성(同姓)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사족 집단은 각자가 뚜렷한 조상을 내세우면서 결속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며 살았다. 서원이나 불천위묘(不遷位廟) 등을 내세울 수 있었던 몇몇 집안이 대표적이다. 청풍 김씨는 김식(金湜)·김육(金堉) 등을 배향한 봉강서원(鳳岡書院), 안동 권씨는 권상하를 배향한 황강서원(黃江書院)이라는 사액 서원을 권위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정익하(鄭益河)의 불천위를 모셨던 영일 정씨도 같은 경우다. 진주 강씨와 의흥 박씨도 강유(姜裕)를 배향한 남당서원(南塘書院), 박수검(朴守儉)을 배향한 임호사(林湖祠)를 중심으로 가문의 위상을 공인받았다.
[근대]
개항기 제천 지역은 왕조가 겪었던 풍상 속에 서게 되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숨어들어 그들의 가르침을 은밀히 전수한 곳이 바로 구학산 아래 배론이었고,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도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배론은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의 무대였고, 유명한 동학 지도자 성두한(成斗漢)의 활동이 전개된 곳이기도 하다.
제천 지역의 의병 항쟁은 너무나도 유명한데, 호좌의진(湖左義陣)의 기치를 내건 의병 부대가 단발령 이후부터 조선이 망한 이후까지 활동하면서 반외세 투쟁을 전개했다. 유인석(柳麟錫)과 이강년(李康秊) 같은 저명한 의병 지도자가 활동한 중심 무대가 바로 제천 지역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제천 지역은 식민지 지배 기구 속에 편입되었다. 촘촘히 짜인 ‘면(面)’ 제도가 느슨했던 기왕의 제도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특히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청풍군과 충주의 덕산 지역이 제천군에 합쳐지게 되었다.
무단 통치 시기를 거친 후 1919년 제천 지역에서는 이범우(李範雨)가 중심이 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천 출신의 황학수(黃鶴秀)는 광복군 지휘관으로 활약하며 고향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일제의 자원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배후 도시 중의 하나로서 제천은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해방 이후]
해방이 되자 제천의 지역 사회는 요동쳤다. 빨치산 투쟁이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다 6·25 전쟁 때는 몇 번이나 피난 보따리를 싸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놓이기 시작한 철도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동 인구가 들끓었으며,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의 교차점으로서 물류의 중심지로 주목을 받으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제천 지역은 침체의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시로 승격하면서 농촌 지역이 제원군(堤原郡)으로 분리되었고,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청풍 쪽의 중심지를 비롯한 수많은 마을이 물에 잠겼으며, 태백산맥 일대의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배후지로서의 강점도 쇠퇴하였다. 철도가 차지하는 물류상의 장점이 사라지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왔던 것이다.
제천시가 제원군과 통합된 것은 1991년이었다. 1995년 지방 자치제가 시행되면서 군사 쿠데타 이후 중앙에서 임명하던 단체장도 주민이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에 대학교가 세워져 지역 발전의 중요한 계기도 확보되었다. ‘제천 의병제’나 권섭의 문학 혼을 기리는 ‘옥소 예술제’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이루었고, ‘금강산 사과나무 가꾸기’나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 ‘제천 국제 한방 바이오 엑스포’와 같은 국제 행사는 제천이 통일 시대를 향하여, 또는 세계 속의 제천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