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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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지용 |
하윤구 출생 | 1570년 - 1570년 하윤구, 영신마을에서 출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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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구 사마시에 합격 | 1610년 - 1610년 하윤구 40세에 사마시 합격하다 |
하윤구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 1633년 - 1633년 하윤구, 64세에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하다 |
하윤구 사망 | 1646년 - 1646년 하윤구 77세에 사망하다 |
하백원 진사시에 합격 | 1803년 - 1803년 하백원 진사시에 합격하다 |
하백원 형조좌랑 역임 | 1838년 - 1838년 하백원 형조좌랑 역임하다 |
하응락 출생 | 1867년 - 1867년 하응락 출생하다 |
하응락 사망 | 1936년 - 1936년 하응락 사망하다 |
쌍렬문 이전 | 1933년 - 하성래씨의 증조부인 하응락에 의해 1933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었다. |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동국지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5호로 지정 | 2005년 12월 27일 - 2005년 12월 27일,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동국지도가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
마을지 | 할아버지 당산나무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금사정 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양졸당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쌍렬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야사 마을 사람 둘 중 한 명이 진양 하씨]
2013년 현재 야사 마을에는 52가구가 살고 있다. 하씨, 나씨, 이씨, 김씨, 조씨, 정씨, 송씨, 최씨 등 8개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혼인으로 인한 이주 성씨인 유씨, 한씨, 박씨, 임씨, 천씨, 성씨 등 14개 성씨가 합해져 100여명이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진양 하씨는 마을 인구 전체의 약 45%이상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 총독부에 임시국제조사과 『조선의 성(姓)』에 의하면 당시 야사 마을에 거주하는 진양 하씨가 30가구였으며 동족 마을로 보고 있다. 1986년과 1991년 화순에서 조사한 마을에 관한 기초조사를 토대로 1996년 발간한 『마을 유래지』에서도 야사 마을 전체 53세대 중 28세가 진양 하씨 집안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야사 마을에 1600년 경에 입향한 진양 하씨는 현재까지 실학 마을의 중심 축을 형성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긴 역사만큼이나 명망을 떨친 인물들이 많다. 지금의 야사 마을이 안정된 향촌 사회로 자리를 잡는 데에는 야사 마을 주민들 모두의 힘과 함께 과거부터 이어져온 진양 하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64세에 문과에 합격한 하윤구]
금사(錦沙) 하윤구(河潤九)[1570~1646]가 영신 마을에서 야사 마을로 옮겨 터를 잡고 마을 안쪽 할아버지 당산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 옆에 ‘금사정’을 짓고 거주하면서 진양 하씨의 야사 마을 생활이 본격화 되었다. 그의 중앙 정계 진출과 민생에 대한 고민은 향촌 사회로서의 야사 마을이 안정 기반을 찾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윤구는 동복 현감 정구와 김부륜에게 수학하였으며 40세가 되던 해인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진학하였다가 5년 후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반대한 이원익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승정원이 이를 왕에게 올리지 않자 성균관 담벼락에 분개하는 글을 남기고 한성시 과장(科場)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하윤구는 64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종6품 율봉찰방, 정6품 성균관 전적 등의 벼슬을 지냈다.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정지준, 정호민, 김종지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였다. 그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세제도 개혁과 운영개선안 등 꾸준히 민생안정책을 주장하였다.
하윤구가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과 향촌사회에 있으면서 민생에 대해 고민한 것은 야사 마을이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영청, 진양 하씨 문중과 마을 번영을 위해 힘쓰다]
병암(屛巖) 하영청(河永淸)[1697~1771]은 하윤구의 증손으로 증조부의 뜻을 이어 야사 마을의 안정화에 힘을 쏟았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두 형까지 세상을 떠나자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가업에 전념하였고 향촌의 운영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우선 정읍, 태인 등지에 흩어져 살피지 못했던 선산이나 집안의 흔적을 찾아 수호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인근 학당 마을에 있던 하영청의 4대조 하대표의 형 하대붕의 처 동복 오씨 정려와 전도 마을에 있던 이득천 처 진양 하씨 정려를 야사 마을로 옮겨 쌍렬문을 만들었다. 현재 야사 마을의 쌍렬문은 하영청이 옮겼던 자리에서 1933년 다시 이건된 것이기는 하지만 두 곳에 있던 선조의 흔적을 찾아 야사 마을로 옮겨 그 뜻을 계승하도록 한 것은 하영청의 공임이 틀림없다.
향촌 발전을 위한 하영청의 활동은 하윤구의 민생 안정책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신분에 따라 개인이나 가호가 부담하는 세금을 마을에서 공동으로 납부하도록 하여 관청으로 마을에 부과된 군역 및 잡세 등을 변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신분법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고, 빈부에 따라 차별 과세를 내면 되기 때문에 조세 부과와 부담의 균형 즉 균부균세(均賦均稅)를 추구한 셈이다. 또한 마땅한 교육 시설이 없었던 마을에 하영청이 장정 70명을 고용할 비용을 내어, 나경적이 기부한 집터에 강당을 마련하고 마을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고 전한다.
[하백원, 호남의 4대 실학자가 되다]
하영청의 증손 규남 하백원(河百源)[1781~1844]은 호남의 4대 실학자(신경준, 위백규, 하백원, 황윤석) 중 한 명이다. 1803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10년 농민들을 위하여 물을 뿜어 올리는 자승차(自升車)를 제작하였으며, 이어 1811년에는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업적이 세상에 알려져 1834년 음직(蔭職)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고, 1838년(헌종 4) 형조좌랑에 올랐다. 그 뒤 종묘영(宗廟令)을 거쳐 1841년 석성현감이 되었으나 지방 세력과의 의견 대립과 충돌로 인해 이듬해 보령으로 귀양 갔다가 다음해 바로 풀려나 1844년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하백원은 경전(經傳)은 물론 성신(星辰), 율력(律曆), 산수(算數), 전예(篆隷), 도장(圖章) 등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당시 성리학에 치우친 세태를 비판하고 농공상가(農工商賈)도 학문임을 주장하였다. 하백원은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여 농민들을 위한 자승차의 개발과 시간이 되면 소리를 내는 자명종, 술잔이 차면 술이 밑으로 없어지는 계영배, 물의 수압을 이용한 항흡기, 한 곳에 불을 때면 여러 방이 따뜻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개량 아궁이,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지도인 「동국지도」[1811년]와 서구식 세계 지도인 「만국 전도」[1821년] 등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많은 발명품을 만든 훌륭한 과학자이자 실학자이다.
[선대 실학자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후손들]
야사 마을 진양 하씨의 학문적 기질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의 야사 마을 출신 인물로, 장릉참봉을 지냈던 하응락(河應洛)[1867~1936]을 꼽을 수 있다. 하응락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예절을 따르고 의리를 지켰던 인물이었으며 선대를 살피고 마을의 번영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때 “망국의 신하가 무슨 낯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라고 하며 야사 마을 옆 태평동에 초당을 마련하고 은거하면서 주민들의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하응락의 기질은 다시 하성래 씨로 이어지고 있다. 하성래 씨는 학문을 좋아하며 선대를 살피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데 힘썼다. 그는 인근 광주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고 대학의 국어 국문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2000년 정년퇴임 하였다. 그는 야사 마을에서 추진된 규남 박물관 건립을 비롯한 하백원 기념사업의 일등 공신이다. 하영청의 문집 『병암 유고』, 하백원의 문집 『규남 문집』 등과 하백원의 『자승차도해』를 비롯하여 규남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유물들은 모두 하성래 씨가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성래 씨는 선조의 뜻을 이은 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금사 하윤구에서 병암 하영청, 규남 하백원, 그리고 하응락으로 이어지는 야사 마을 진양 하씨 집안의 역사를 오래도록 간직해 왔다. 하백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야사 마을을 빛나게 하는데 노력하고 있는 하성래 씨는 야사 마을에 실학의 정신이 살아 숨 쉬도록 하는 산 증인이다.
“어린 시절 규남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자명종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규남 할아버지 셋째 아들 처가인 순창의 양문수 씨가 자명종하고 계영배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순사가 빌려가서 돌려주질 않고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걸 빌려주지 않거나 되돌려 받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면 실학자 하백원의 업적이 더욱 빛날 수 있을 텐데요.”(하성래)
그리고 하성래 씨는 앞으로도 금사공 할아버지의 ‘금사정’을 복원해서 마을의 역사와 선조들의 뜻을 이어가고, 규남 박물관과 함께 과학, 실학을 체험할 수 있는 체험관도 건립해서 야사 마을이 하백원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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