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1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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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二樂亭 |
영어공식명칭 | Leeyojeo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로 822-153[구룡리 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순강 |
건립 시기/일시 | 1644년 - 이요정, 김억립(金嶷立)이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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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880년 - 이요정, 김재만이 중건 |
이전 시기/일시 | 1882년 - 이요정,김익용이 중건 |
이전 시기/일시 | 1931년 - 이요정, 중수 |
현 소재지 | 이요정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함양로 822-153[구룡리 6] |
성격 | 건물 |
양식 | 한식목조와가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5칸 |
소유자 | 선산김씨 문중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구룡리에 중수된 정자.
[개설]
이요정은 구룡천과 인접하여 그 풍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구룡천은 조선 전기 함양군수였던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그 아름다움을 보고 서계(西溪)라고 하였던 곳이다.
[위치]
구룡천 상류부 오른쪽 언덕 구릉의 남사면 말단부에 있다. 함양군 함양읍에서 국도24호선인 함양로를 따라 인월 방향으로 가면 왼쪽에 대운사 안내판이 있다. 이를 따라 약 800m를 더 가면 구룡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는데, 그 건너편에 정자가 있다.
[변천]
이요정은 처음에는 집의(執義)였던 김적(金磧)이 폐사지에 후손들의 공부를 위해 작은 집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후에 성균관 진사 손재(遜齋) 김억립(金嶷立)이 명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알고 1644년(인조 22)에 낙향하여 이 자리에 다시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정자 이름을 ‘이요정’이라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인산지수(仁山智水)’, 즉 ‘인자로운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물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정자 주변의 구룡천 오른쪽 언덕에는 ‘서계동천(西溪洞天)’ ‘영귀암(詠歸岩)’ ‘잠부동(潛夫洞)’ ‘풍호대(風乎臺)’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요정은 1880년과 1882년에 중건된 기록이 있고, 2018년도 기준으로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중수된 것이다.
[형태]
이요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구룡천 오른쪽 언덕의 평지에 남향으로 세웠다. 정당의 서편에 대문채가 1동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이다. 정당의 평면은 가운데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툇마루 딸린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中堂夾室)형이다. 동쪽 방은 ‘모명재(慕明齋)’라 하고 서쪽 방은 ‘망남헌(望南軒)’이라 했는데 모두 멸망한 명나라를 생각하며 붙인 명칭이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세벌대로 쌓았으며 초석도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원주와 각주를 혼용했는데 정면에만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공포의 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도리는 사각형의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상부가구는 도리가 3개인 3량가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고 한식기와로 마감하며 암수막새를 사용하였다. 대문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현황]
이요정에는 역대 함양군수, 후손, 유생들이 쓴 29편의 편액이 걸려 있어 그 위계를 보여준다. 최근 수리가 있었으며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해 놓았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사용된 이요정은 선산김씨 문중의 정자로 함양군의 정자 문화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경관이 좋은 곳에 정자를 건립하기 위해 폐사지에서 정자를 건립한 것은 왕조의 변화에 따른 건축양상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