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0828
한자 李炳憲
영어공식명칭 Lee Byeongheon
이칭/별칭 자명,추연,진암,백운산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이병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이병헌, 배산서당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이병헌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1년 - 이병헌 흉상 건립
출생지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배산서당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907번길 32[사월리 465]
묘소|단소 상림공원 -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필봉산길 49[운림리 354-1]지도보기
성격 문인·학자
성별
본관 합천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출신 유학자.

[가계]

이병헌(李炳憲)[1870~1940]의 자는 자명(子明), 호는 추연(秋淵)·진암(眞菴)·백운산인(白雲山人)이다. 본관은 합천(陜川)이다. 이병헌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에 거주한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1501~1568]의 13세손이고, 10대조인 이전(李銓) 때 함양으로 이거하였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의 문인으로, ‘한주(寒洲)학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활동 사항]

이병헌은 1903년(고종 40)에 서울에서 시국의 변화를 접하고 청나라 강유위(康有爲)[1858~1927]의 ‘변법설(變法說)’을 읽으면서 점차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에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에 학교를 설립하여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송호서당에서도 의숙(義塾)을 설립하여 아동들을 교육하였다.

1914년부터 192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여 직접 강유위의 지도를 받았다. 이병헌은 강유위의 영향으로 금문경학(今文經學)과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 연구에 매진하였고, 공교(孔敎) 사상가로 활동하면서 경학 기초를 갖추는 데 힘썼다. 공교가 여전히 현대에도 가치가 있다고 본 이병헌은 전통 향교식(鄕校式) 유교가 아니라 서구 기독교식으로 유교의 전수 방식을 변경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병헌은 직접 1923년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 ‘배산(培山)서당’이라는 최초의 ‘민립문묘(民立文廟)’를 설립하였다. 또 중국 취푸[곡부(曲阜)]의 공교회로부터 한국공교회 지부 설치를 인가받아 활동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병헌의 공교 운동은 여전히 보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유림의 강경한 저항에 부닥쳐 실패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병헌은 1914년 중국 베이징에서 저술한 「종교철학합일론(宗敎哲學合一論)」에서 공교 사상이 나타났고, 1919년 중국 산둥성 칭다오[청도(靑島)]의 동문(同文)인쇄국에서 간행된 「유교복원론(儒敎復原論)」에서 유교를 혁신 수준으로 체계화하였다. 1920년대에도 「공경대의고(孔經大義考)」를 비롯하여 금문의 시경(詩經)·서경(書經)·예경(禮經)·역경(易經) 등을 연구하고, 주석하여 더욱 체계화하였다. 이병헌의 문집은 친필 유고본으로 전하다 1989년에 『진암전서(眞菴典書)』(아세아문화사)로 영인·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2001년 상림공원에 이병헌 흉상을 세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3.20 내용 수정 [한자명] 이병헌(李柄憲) → 이병헌(李炳憲)
이용자 의견
김** 李柄憲
이병헌(李柄憲)[1870~1940]
->
병 炳
  • 답변
  • 디지털함양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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