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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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漢默 |
영어공식명칭 | Yang Hanmook |
이칭/별칭 | 길중(吉仲),경조(景朝),지강(芝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환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4월 29일 - 양한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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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양한묵 탁지부 주사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양한묵 능주 세무관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양한묵 동학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904년 - 양한묵 보안회 서기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양한묵 헌정연구회 조직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양한묵 천도교 총부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양한묵 천도교 법도사(法道師)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양한묵 천도교 직무도사(職務道師)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양한묵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05월 26일 - 양한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양한묵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11월 30일 - 전라남도 해남군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전라남도 화순군 ‘지강 양한묵 순국비’ 건립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03월 01일 -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 |
출생지 | 전라도 해남현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송촌리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송촌리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산126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
[정의]
일제강점기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양한묵(梁漢默)[1862~1919]은 1862년 4월 29일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33인 중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가계]
양한묵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길중(吉仲)·경조(景朝), 호는 지강(芝江)이다. 아버지는 양상태(梁相泰)이고 어머니는 낭주최씨(郎州崔氏), 부인은 풍산홍씨(豊山洪氏)이다.
[활동 사항]
양한묵은 어렸을 때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부터 불교·선교·천주교·신교(神敎) 등에 대한 다양한 서적을 접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이때 동학이 농민층의 지지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1895년 말 탁지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고, 1895년 11월부터 1896년 7월까지 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1896년 7월 상경하여 거주하다가 1897년에는 중국 북경 등지를 유람하였고, 189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혔다. 일본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교류하였으며, 1904년 동학에 입교하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1904년에 귀국한 양한묵은 1904년 7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양여 요구에 반대하여 이동재·송수만·심상진 등과 서울에서 보안회(輔安會)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1904년 12월에는 일진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황실의 지원과 보부상의 참여 속에 설립한 공진회(共進會)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05년에는 입헌군주정 실시를 위한 헌정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으며,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헌정요의(憲政要義)」라는 글을 1905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연재하였다.
1905년 8월 다시 일본으로 간 양한묵은 손병희를 만나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는 문제를 협의하였고, 1905년 말에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천도교의 근대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06년 1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귀국한 양한묵은 서울에 천도교 중앙 총부가 창립되자 1906년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1907년 현기사장(玄機司長)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07년 7월에 이기·고정주·강화·백인기·나인영·윤주찬 등이 호남의 교육 발달을 목표로 호남학회를 설립하자 이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양한묵은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4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후에는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여 1910년 법도사(法道師)·진리관장(眞理觀長),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 등을 역임하였다. 1912년에는 교리강습소를 개설하여 천도교인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는데, 교리강습소 활동은 3·1운동 시 각지의 천도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한 배경이 되었다.
양한묵은 신문 기사를 통해 미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중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독립 선언 계획을 듣고 적극적인 참여를 결심하였다. 2월 27일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손병희·이종일·이종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양한묵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재판이 끝나기도 전인 1919년 5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양한묵은 1906년 『천도교문』·『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천도교전(天道敎典)』, 1907년 『성훈연의(聖訓演義)』·『도경(道經)』·『체리종약(體理宗約)』·『현기문답(玄機問答)』, 1909년 『대종정의(大宗正義)』, 1912년 『무체법경(無體法經)』을 저술하여, 동학의 교리를 현대 문명에 맞게 근대화하는 천도교 교리서 편찬에 공헌하였다.
[묘소]
양한묵의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산126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양한묵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해남군에서는 양한묵을 기리기 위해 1991년 11월 30일 고향인 옥천면 영신리에 ‘자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