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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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也川部曲 |
영어의미역 | Daeyacheon-bugok Local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해영 |
관할 지역 | 북천면 화정리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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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전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화정리 지역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부곡은 원래 전쟁 포로의 집단적 수용지이거나, 본래 군·현이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이나 적에 투항하는 등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군현의 격이 떨어져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생 촌락처럼 지리적 조건이나 사회·경제적 여건이 열악하여 특수한 행정 구역으로 편성된 곳이기도 하다. 부곡은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존재하였으나, 조선 왕조에 이르러 특수 행정 구역이 일반 군현으로 폐합되는 과정에서 거의 소멸하였다. 다만 일부 지역에는 조선 초기까지도 존재하여 부곡리(部曲吏)가 부곡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목 고적조에 “대야천부곡은 일명 선천(鐥川)이며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편찬된 『진양지(晉陽誌)』 각리(各里)조에는 대야천이란 동리 명칭이 보이지 않는 대신 주의 서쪽 40리에 위치한 북평리(北坪里)에 대하여 “주의 서쪽 40리에 있으며 동쪽은 원당, 남쪽은 곤양과 경계하고, 서쪽은 동곡, 북쪽은 다회탄이며 속방이 셋으로 추동, 장동, 지내다”라고 하여 대야천이 어느 시기부터 북평으로 불리워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 진주목 방리조에는 “대야천은 관문과의 거리가 50리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대야천이 진주목의 한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조선 후기까지 여전히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일찍이 부곡이었던 대야천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진주목 관할 영역의 확대에 따라 진주목의 직촌으로 흡수되어 진주목 관내의 한 지역으로 지칭되었으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한때 북평리로도 불리었다. 진주에 속하였던 대야천면은 이후 대한제국 말 지방 행정 구역의 개편에 따라 하동군 대야면이 되며, 그 후 하동군 북면과 합쳐져 북천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하동군 북천면 화정리 일대가 과거 대야천부곡이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각읍 고적조에 기록된 폐현, 향, 부곡 등은 고려 왕조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면 행정적 단위로서의 기능이 소멸되어 유적지로 남겨진 곳이다. 특수한 행정 구역이던 대야천부곡은 고려 초기 진주목이 전국 12주목의 하나로 설치되어 관할 영역이 확대되면서 진주목의 직촌으로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진주목의 여러 부곡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