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95
한자 韓德銖
영어공식명칭 Han Deoks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한덕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한덕수 일본 이주
몰년 시기/일시 2001년 2월 21일연표보기 - 한덕수 사망
출생지 한덕수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학교|수학지 한덕수 학교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한덕수 학교 - 일본 도쿄
묘소 한덕수 묘소 - 북한 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리
성격 노동 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재일 노동 운동가.

[개설]

한덕수(韓德銖)[1907~2001]는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자 보호를 위한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재일조선인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간부가 되고 ‘민족파’의 중심 인물로서 북한과의 제휴를 중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이 되어 재일조선인운동을 이끌어가는 최고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가계]

한덕수는 1907년 2월 18일 경상북도 경산군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한덕수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를 4년간 다닌 후 성악가를 꿈꾸며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음악 학교의 입시 관문을 뚫지 못하였다. 대신 1929년 도쿄[東京]의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신문 배달로 고학하며 다니다 중퇴하였다. 그 후 노동운동으로 눈을 돌려, 1931년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전협(全協)] 산하의 일반노조 도쿄 지부에 가입하고, 1933년 8월 시즈오카현[靜岡縣] 아타미시[熱海市]의 히가시즈[東伊豆] 노동조합 상임위원이 되었다. 1934년 9월 아타미선 철로의 터널공사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의 쟁의를 지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되어 재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선고를 받았다.

태평양전쟁 종전 후 간토오[關東] 지방 조선인회 결성을 주도하고,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련(朝聯)]이 결성될 때 참여하여 가나카와현[神奈川縣] 본부 위원장과 중앙본부 총국장을 지냈다. 1949년 9월 조련이 주일연합군총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해산될 때 다른 간부들과 함께 공직에서 추방당하고, 12월에 일본공산당 민족대책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럼에도 한덕수는 일본공산당 영향권 하의 조선인 주류파인 ‘민대파(民對派)’에 맞서 북한과의 제휴를 중시하는 비주류 ‘민족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재일조선인운동의 노선 전환을 주도하였다.

1951년 구월서방(九月書房)을 개설하여 북한의 조선노동당 선전부로부터 기증받는 출판물 등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재일조선인운동을 전개하였다. 1952년에는 조선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정기간행물 『조선문제연구』를 펴내며 사상·문화투쟁의 거점으로 삼았다. 1955년 5월 25일, 조련 조직을 계승했던 재일조선민주통일전선[약칭 민전]이 일종의 자기 비판을 거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朝總聯)]로 재결성될 때 중앙상임위원회 6인 의장단의 수석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 5월 조총련 제4회 전체대회에서 비주류파[구 민대파] 배제와 더불어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독 의장·부의장제가 도입되면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체제 속에서 민족교육을 비롯하여 문화·예술·출판·보도·금융·경제에 이르는 거대 조직체계를 구축해갔다. 그리하여 1968년 이래 조선대학교 학장도 계속 역임하였고, 1970년을 전후하여 부의장 김병식(金炳植)이 공공연히 반기를 드는 파란이 있었지만 잘 수습하여 2001년의 타계 때까지 조총련 의장직을 지켰다.

1949년 6월 평양(平壤)에서 개최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 후로 일관되게 친북 노선을 고수하였다. 1957년 12월의 제2회 대회에서는 상무위원 겸 의장단 7명 중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1967년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72년 백남운(白南雲)의 후임으로 의장이 되고 1986년까지 재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한덕수의 저서로 1986년 일본 도쿄에서 간행한 『주체적 해외교포운동의 사상과 실천』이 있다.

[묘소]

한덕수가 2001년 2월 21일 일본에서 사망하자 시신이 평양으로 옮겨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상훈과 추모]

한덕수는 1977년 북한 정부로부터 2중 노력영웅 칭호와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한덕수의 재일조선인운동과 북한옹호 노선의 공적을 높이 산 북한 정부는 경공업부문의 전문인력 양성기관인 평양경공업대학을 1995년 4월에 ‘한덕수 경공업대학’으로 교명 변경하였고, 1996년 1월에는 다시 ‘한덕수 평양경공업대학’으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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