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88
한자 玄泳晩
영어공식명칭 Hyun Yeongman
이칭/별칭 송본긍평(松本亘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1년 5월 2일연표보기 - 현영만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0년 4월 - 현영만 대구사범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1년 3월 - 현영만 대구사범학교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43년 6월 - 현영만 무우원 사건 가담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현영만 대통령 표창 수여
몰년 시기/일시 1981년 4월 6일연표보기 - 현영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현영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현영만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 97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현영만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상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현영만 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78
묘소 현영만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 71길 33[신암동 산 27-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경산군 진량국민학교 교사|무우원 총무부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현영만(玄泳晩)[1921~1981]은 1940년부터 대구와 경산에서 항일비밀결사 조직인 무우원(無憂園)의 간부로 활동하다 1943년 피검되어 옥고를 겪었다.

[가계]

현영만의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일본식 이름은 송본긍평(松本亘平)이다. 1921년 5월 2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현영만은 1940년 4월 대구사범학교 특설강습과에 입학하였다. 6월 동급생 조형길(趙亨吉)·김병욱(金炳旭)과 함께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밀약한 후 다른 동급생 이형수(李亨洙) 등 여러 명을 포섭해갔다. 12월 1일 현영만 등은 학교 근처 대봉정(大鳳町)에 있는 이형수의 하숙방에서 무우원(無憂園)을 결성하고 약칭 ‘M’이라 했다. ‘무우원’이란 말 그대로 근심·걱정 없는 낙원이란 뜻인데, 승려 출신으로 결사를 주도한 조형길[본명 조소영(趙宵影)]의 제안으로 지어진 불교 색채의 이름이다. 『백유경(百喩經)』 속 우화들의 가르침대로 대승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폭력투쟁을 지양하고, 조선어문학 연구를 통한 문화향상과 경제 부문의 실력양성으로 민족의식 고양과 독립 달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함에 목표를 두었다. 또한 일제가 내세우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의 기만성과 동조동근설(同祖同根說)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어내 폭로함과 아울러 지원병 모집, 공출·징용 등의 강박적 요구는 일절 거부하기로 당면 행동방침을 정하였다. 규약도 정하여 집행장 휘하에 총무·선전·경제·과학·종교·문예·후생의 7개부를 두기로 하였다. 집행장은 조형길이고 현영만이 총무부장을 맡았다.

현영만은 1941년 3월 말 대구사범학교를 수료하고 경산의 진량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함께 교사가 된 김병욱·이형수와 양산(梁山) 통도사의 스님 등 여러 명을 끌어들여 조직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 어느 조직원의 밀고로 회원 18명이 경찰에 붙잡혀갔고, 그 중 13명은 예심에서 풀려났으나 도쿄 지부장 최수원(崔壽源)이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하고 현영만 외 조형길·김병욱·강증룡 등 4명은 기소되었다. 1944년 6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묘소]

현영만의 묘소는 국립신암선열공원[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 71길 33] 제1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현영만은 1977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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