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377
한자 慶山縣
영어공식명칭 Gyeongsan-hyeon
이칭/별칭 옥산(玉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17년 - 경산군을 경산현으로 승격하고 현령을 파견
개정 시기/일시 1390년 - 경산현을 경산군으로 승격하고 지군사를 파견
개정 시기/일시 1392년 - 경산군을 경산현으로 강등
개정 시기/일시 1532년 - 경산현에 현감 파견
개정 시기/일시 1601년 - 경산현을 대구부에 합속
개정 시기/일시 1607년 - 경산현을 대구부에서 복현하고 현령 파견
폐지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경산현을 경산군으로 개칭

[정의]

고려 후기부터 189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경산현(慶山縣)은 1317년(충숙왕 4) 기존의 경산군(慶山郡)을 승격시키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동 지역[신천동·남방동·내동·여천동·유곡동·점촌동 제외]과 남천면, 압량읍 북부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신매동·삼덕동·성동·연호동·고모동·시지동·매호동·사월동·가천동·노변동·이천동·대흥동, 동구 율하동·용계동·금강동·내곡동 일대를 관할하였다. 별호는 ‘옥산(玉山)’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17년 국사(國師) 일연(一然)의 고향이기에 감무(監務)를 파견하는 ‘군’에서 현령(縣令)을 파견하는 ‘현’으로 승격되면서, 경산현이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설치 연혁 및 관원 등이 소개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 임진왜란 직후의 치폐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경산군으로의 개칭은 1895년(고종 32) 5월 26일[음력]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의거한 것이다. 그 외에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장산지(獐山誌)』 등에 경산현의 연혁과 현황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15세기 전반 경산현의 호구는 318호, 3,049명[남자 1,337명, 여자 1,712명]이었으나, 1789년(정조 13)에는 3,431호, 15,551명[남자 7,225명, 여자 8,326명]으로 급증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3,165호, 16,131명으로 호수는 줄었지만 전체 인구는 소폭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 추이는 토지결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15세기 간전(墾田) 3,479결, 수전 1,304결이었으나, 19세기에는 한전(旱田) 2,619결, 수전(水田) 1,356결로 감소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 전결수를 측량하는 기준의 변화가 원인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경산현의 토성은 김(金)·전(全)·백(白)씨, 내성(來姓)은 풍각(豐角)에서 온 노(魯)씨, 속성(續姓)은 자인(慈仁)에서 온 박(朴)씨, 경주에서 온 정(鄭)씨 등이 있었다. 이들 토성 세력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경산현 지역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경산 전씨[옥산 전씨]는 조선시대 이후에도 꾸준히 경산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대체로 다른 고을 출신의 가문들이 조선 시대 경산 지역을 주도하게 된다.

『장산지(獐山誌)』 성씨조에는 1679년(숙종 5) 「향안(鄕案)」에 수록된 성씨를 소개해 놓았는데, 이들이 조선 후기 경산현을 대표하던 성씨들이었다. 이 가운데 초계 정씨[정연(鄭珚)아산 장씨[장흥부(蔣興膚)]·밀양 박씨[박해(朴晐)]·진산 진씨[진하(陳夏)]·함양 여씨(咸陽呂氏)·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임진왜란 이전에 경산에 정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경산에 정착한 가문으로는 해남 승씨[승적(承迪)]·청주 한씨[한순(韓珣)·한경희(韓景禧)]·달성 서씨[서사선(徐思選)]·풍양 조씨[조계진(趙繼陳)]·안동 권씨[권숙(權俶)]·청주 정씨[정유약(鄭惟爚)]·밀양 박씨[박찬(朴燦)·박수(朴燧)]·동래 정씨[정현구(鄭賢耈)]·현풍 곽씨[곽흔(郭昕)·곽의지(郭義之)]·밀양 손씨[손양복(孫陽復)]·인천 채씨[채구령(蔡九齡)·채주하(蔡冑夏)]·밀양 박씨[박개한(朴開漢)] 등이 있다.

[변천]

1390년(공양왕 2) 공양왕의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는 경산군으로 잠시 승격되었다가, 1392년 조선왕조가 건립되면서 다시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는 경산현으로 강등되었다. 1532년(중종 27) 살모(殺母) 사건이 발생하여 읍격이 강등되어 종6품의 현감을 파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고을이 조잔(凋殘)해지자 1601년(선조 34) 인근 하양현과 함께 대구부(大丘府)에 합속되었다가, 1607년(선조 40)에 복현되었다. 이후 다시 현령을 파견하였다.

1895년 5월 26일[음력]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따라, 1895년 윤5월 1일[양력 6월 23일] 부로 기존 8도 체제를 23부 체제로 개편하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면서 전국이 23부 337군 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경산현은 23부 가운데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경산군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산현의 존재는 중세 지방 행정제도 운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국사에 있어서 행정구역은 호구(戶口)·전결(田結) 및 산천(山川)의 경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인적 연고나 이해 관계에 따라 읍명과 읍격이 변화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고려 후기 경산현의 변화상도 인적 연고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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