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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9
한자 南宗畵-大家許百鍊
이칭/별칭 의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허경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을 거점으로 호남 지역 남종화 화맥을 이끈 화가.

[개설]

허백련(許百鍊)[1891~1977]의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의재(毅齋)로 전라남도 진도 출생이다. 호남 지역 남종화(南宗畵) 화맥을 계승, 발전시키며 광주 화단을 이끌었다. 연진회(鍊眞會)의 여러 서화가들과 교류하면서 허백련 스스로도 다양한 화풍을 남종화와 접목하였다. 특히 실경(實景) 산수화, 청록(靑綠) 산수화를 제작하면서 다양한 기법적·재료적 활용의 폭이 확대되어 갔다. 허백련연진회는 중앙 화단과 차별화된 광주 화단의 특수성과 그 풍토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광복 이후 허백련춘설헌(許百鍊春雪軒)으로 거처를 옮긴 뒤, 허백련을 대표하는 창작 활동 시기에 접어들었다. 일생에 걸쳐 고수하였던 남종화에 대한 철학으로 허백련은 '최후의 남종화가'라고 불리며 높이 평가되고 있다.

[허백련의 계보]

한국 전통 남종화의 흐름에 있어서 20세기에 활동한 허백련은 다른 누구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로 평가된다. 근대기 일본으로부터 '미술'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서화의 개념이 해체·재정립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통 남종화를 고수하고 이를 강조하며 두각을 나타낸 수묵 채색 화가이다.

조선 후기 호남 화단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게 서화를 배운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이 1856년(철종 7) 김정희가 사망하자 전라남도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한양을 오가며 활동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호남의 수묵 채색화는 허련으로부터 이어지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의 계보를 중심으로 그 맥을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련의 남종 문인화는 허련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1862~1938]을 거쳐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과 방계손인 허백련으로 이어졌다. 구한말 허형에 의해 이어진 호남 남종화의 계보는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허백련과 허건의 양맥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발전하였다.

운림산방이 위치한 진도의 남종화가 광주와 목포로 확산된 것은 허형과 허건, 허백련의 이주와 관계되어 있다. 진도 출신인 이들이 각각 광주와 목포를 거점으로 삼은 것은 일제강점기 근대화, 산업화를 통한 도시의 성장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허백련은 1912년 법학 공부를 위해 일본 교토[京都]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본에 머무는 동안 화가로 전향하여 일본 남화(南畫)의 거장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에서 그림을 익히고, 서화가들로부터 화법을 배웠다.

허백련은 일본 유학시절 고무로 스이운 밑에서 수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남화 양식을 따르지 않았다. 같은 스승 문하에서 그림을 익혀 사제간 영향 관계가 밝혀진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 수운(首雲) 김용수(金龍洙)[1901~1934]와는 다르게 전통 남종화를 고수한 일은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허백련의 예술 활동]

1916년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두 번에 걸쳐 개인전을 가진 허백련은 1918년 귀국 후 1920년 일본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개최하였던 경험을 토대로 목포공회당[지금의 목포상공회의소]에서 첫 전시를 개최하였다. 첫 전시는 목포 유지들의 주선으로 개최된 화회(畵會) 형식의 개인전으로 30여 점을 출품하였다. 허백련이 목포에서 치른 개인전은 호남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근대적 전시회였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한 허백련에게 목포에서의 전시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목포는 어릴 적 허형에게 서화기법을 배웠던 장소였으며, 1917년부터 자신의 고향인 진도와 정기적으로 선박이 운행될 만큼 신흥 도시로서 면모를 갖춘 곳이었다.

허백련은 1921년에도 잇달아 광주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화단 등장 초기부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부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면서 남종 문인화의 전통을 고수해 나갔다.

목포가 일제강점기 개항장으로서 일찍이 근대화가 시작되어 다양한 문화적 저변이 확대되었던 반면 광주는 그 발전이 더딘 편이었다. 목포, 여수, 군산과 같은 개항 도시와 그 인근의 도서 지방이 개화의식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일본으로 향하는 유학생들이 크게 늘어났다. 서울이라는 중앙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도 목포, 여수, 군산 등의 개항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 해외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륙 도시의 보수성을 지닌 광주와 전주에도 개항 도시의 진취적인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근대 미술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서양화를 전공하려던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의 학생들은 일본 비자를 받아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게 어려웠기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으로 가서 서구 문명을 접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서양화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문기(文氣)와 시적 감흥을 중시하던 동양 화단에서도 포착된다.

개항 후 근대 도시로 급성장한 목포는 전통의 답습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30년대 허형의 아들 허건과 허건의 동생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이 목포를 무대로 전통 문인화와 실경 사생(寫生)을 결합하여 새로운 화풍을 모색한 것도 이러한 도시의 개방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허건은 목포를 중심으로 주변 실경에 서양 원근법과 색채 감각을 더해 새로운 조형 세계를 개척해 나갔고, 광주에 정착한 허백련은 남종화의 사의적(寫意的) 관념(觀念) 산수(山水)를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렇게 호남 남화의 회화적 형식과 고전적인 예도를 이은 허건과 허백련은 광주, 목포 등지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며 남도 수묵화의 전통적 화법 위에 각자 독자적인 회화관을 펼쳐 나갔다.

근대기 광주 화단은 허백련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허백련이 1938년에 조직한 연진회를 통해 개별적으로 서화를 통한 인격 도야에 매진한 반면, 허건은 목포에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을 1946년에 조직하여 남종 문인화의 준법을 전수해 나갔다. 때로는 스스로 그림을 익히게 하는 교육 방법을 통해 호남 남화의 화맥을 이어 나갔다. 호남 화단은 오랫동안 남종 문인화의 전통에 천착하고 있었기에 당시 일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허백련과 허건의 문하에서 화업(畵業)을 닦았던 제자들 중 취당(翠堂) 장덕(張德)[1933년 동경 유학], 임인(林人) 허림(許林)[1940년 가와바타화학교 입학], 소송(小松) 김정현(金正炫)[1943년 가와바타화학교 입학], 동강(東岡) 정운면(鄭雲勉)[1943년 동경 유학] 등은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식 교육을 접하였고 이후 고향에 돌아와 개성 있는 그림을 창출하였다. 이들이 수용한 일련의 근대적 미감과 신채색 화법의 작품들은 기존 남화 전통과는 다른 새로운 특성을 보였으며, 화단의 중심이 된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 문부성전람회[문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지역 동양화 분야에 자극을 주었다. 허백련과 허건은 모두 그 뿌리에 남종화를 두고 있지만, 이들의 화풍과 창작 태도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각 지역의 화풍 역시 서로 다른 계열로 나뉘었다.

목포에서 활동한 허건은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하여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목포일우도(木浦一隅圖)」로 특선을 하여 총독상을 수상하였다. 허건은 전통적인 기법을 토대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목포 근교를 중심으로 일상적인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목포교외(木浦郊外)」는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전통적인 산수화 화법에서 벗어난 전경의 구도와 색채를 구사하여 새로운 작품 성향을 선보였다. 유학 후 목포로 돌아온 허건의 동생 허림도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 「전가(田家)」[1941년]와 「6월 무렵」[1942년]으로 연이어 입선하면서 당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와 함께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의 성과를 크게 주목받았다. 허건은 주변의 실경을 토대로 원근법과 색채 감각을 더하여 현장감이 느껴지는 새로운 조형 세계를 개척해 목포 화단을 발전시켰다. 특히 동생이었던 허림의 대담한 전통에의 이탈과 새로운 감각의 수용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후반의 동양 화단은 전통적인 관념 산수가 퇴조하고 오히려 사경(寫景) 산수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부상한 일본화의 신감각주의가 양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1940년경부터 허백련은 남종화의 기법과 정신을 계승하면서 사계(四季) 산수를 통해 독자적인 화풍을 이뤄 나갔다. 허백련의 1940년 작품 「춘경산수(春景山水)」는 사계절의 변화를 주제로 그린 10곡 병풍의 한 폭으로 오른쪽 상단부에 시문을 적어 전통 산수화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개성 있는 화풍을 구현하고 있다. 목포 화단의 상황과는 달리 허백련은 남종화의 사의적인 관념 산수화와 팔군자를 가장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연진회 조직과 활동]

광주에 정착한 허백련은 전통적인 남화의 부흥을 위하여 서화계 후진 양성과 서화 교양의 도량을 모색하기 위해 연진회를 조직하였다. 허백련의 남종화가 더욱 가치 있게 인정되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연진회를 통해 서화 동호인들을 모아 광주 문화의 양질적 토대를 풍성하게 하는데 일조하였기 때문이다.

서화 동호인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연진회는 조선미술전람회를 무대로 활발히 전개되었던 사경 산수와 일본의 영향을 받았던 신감각주의의 대세로 인해 오히려 뚜렷한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전라남도는 물론 전라북도의 서화 향유층까지 찾아와 연진회에서 개최한 전람회를 즐길 정도로 연진회는 광주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연진회는 1938년 전라남도 광주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 '연진회관'이라는 기숙사 형태의 건물을 설립하여 이곳에서 서화회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지며 부정기적으로 단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회원들 중 일부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고, 6.25전쟁 이후로는 서울로 이주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각자의 창작 활동을 펼쳐 나갔다.

광복 이후에는 새로운 세대가 결집하여 무등산허백련춘설헌에서 허백련과 함께 생활하며 서화를 배우고 성장하였다. 이들은 1950~1970년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전라남도미술대전 등 관전(官展)의 동양화, 서예, 사군자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드러냈다.

연진회는 중앙 집중적인 화단의 구조상 드물게 남아 있는 지방 거점의 오래된 수묵 채색화 단체로서 첫 번째 의의를 갖는다. 연진회는 광주에서 창설되어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회원이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의 지역성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남 화단의 화가들은 서울을 왕래하며 창작 활동을 전개하여 서울 화단과 끊임없는 영향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기 다른 화단에 비해 전통적 화법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의의와 평가]

허백련은 일찍부터 신교육과 신문화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지 않고 전통을 중시하여 남종화의 부흥에 힘쓴 인물이었다. 특히 서구 문화와 일본의 신문화 유입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불구하고 농촌을 부흥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허백련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통해 농촌을 계몽하고 농업 종사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특수 학교를 운영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농업이 나라의 근본이요, 조국의 부흥은 농촌의 부흥에 있고 농촌 지도자의 육성에 있다."고 할 만큼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앞장섰다. 또한 무등다원(無等茶園)을 인수하여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는 차밭을 가꾸었다. 허백련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삼애(三愛) 사상이야말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과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라 믿었다. 허백련의 집념과 농촌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30여 년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는 유지되어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허백련은 다원과 농원을 가꾸어 가며 과욕(過慾)이나 허세를 멀리한 선비의 품격을 끝까지 지켜나간 작가이다. 서화뿐만 아니라 농촌 근대화를 위한 농업 교육 사업,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한 활동, 민족주의적 사상가로서 후진들에게 홍익사상의 교훈을 남기고 간 남종화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허백련이 추구했던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 등 삼강령(三綱領)의 실천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절제와 겸양과 중화(中和)로 볼 수 있고, 삼애 사상과 홍익인간 사상은 애국애족을 하는 사랑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허백련의 가르침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자주적 민족정신과 홍익인간 정신으로 사회와 국가를 지키려던 민족정신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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