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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591
한자 演劇
영어공식명칭 Play|Theater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승한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이루어진 희곡을 무대에서 재현한 공연 예술의 역사적 흐름.

[개설]

광주 연극은 크게 1945년 이전의 근대 연극과 광복 이후 현대 연극으로 구분할 수 있다.

[광주 근대 연극]

광주 연극은 창극과 서양 신극을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먼저 창극은 1907년 김창환협률사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김창환협률사는 1906년 협률사가 폐지되자 김창환이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로 내려와 1907년 지방 명창들을 모아서 조직한 단체이다. 김창환협률사는 1909년 봄 「춘향전」을 대화창(對話唱) 형식으로 개작한 「어사와 초동」을 광주천변[현 양림교 부근]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공연하였다. 김창환협률사는 시골의 구석진 곳을 누비며 공연 활동을 하다가, 1910년 8월 경상남도 남해에서 국권 피탈 소식을 접하고 그날로 해산하였다. 양명사(揚明社)는 1909년에 세워진 661m²[200평] 규모의 가설 건물로, 지붕을 이엉으로 덮고 내부는 전면에 무대를 두었다. 객석은 2층 구조로 1층은 맨바닥에 거적을 깔고 2층은 기둥을 세워 다락을 단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남녀 관객을 분리해서 앉게 하였다. 뒤이어 1912년에는 명창 김채만의 타계를 계기로 김채만의 문하생인 김억순, 공창식, 한성태 등이 중심이 되어 광주협률사가 결성되었다. 광주협률사는 「춘향전」과 「심청전」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8년 동안 지속하다가 1920년에 해산되었다.

서양의 신극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성극(聖劇)[성경에서 소재를 따서 꾸민 종교극]을 중심으로 광주에 뿌리내렸다. 191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미국 선교사 배유지와 미국인 의사 오웬이 숭일학원 학생들을 이끌고 이솝우화를 번안한 「늑대와 소년」을 처음 선보였다.

1920년대 광주 연극은 광주협률사의 창극과 배유지 이후 성극, 광주좌(光州座)[1916년 충장로 사거리에 일본인이 세운 극장 1호]나 홍학관 무대를 발판으로 한 신파극, 동우회순연극단·갈돕회[일제 강점기에 장택상 등이 가담하여 만든 고학생 자조 단체 갈돕회가 운영한 동명의 순회 극단]·해참위연예단, 지방 순회공연이 보여 준 신극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는 광주학생운동 영향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되면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반일 사상을 고취하는 연극들이 공연되었다. 1930년 12월 초 최경순 작, 최남주 연출의 「물레방아는 쉬었다」가 광주좌에서 공연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1930년대 광주 연극은 소인극을 중심으로 민중계몽과 항일운동을 고취하기 위한 연극들이 공연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과 통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하여 광복 전까지 광주 연극 활동은 전무하였다.

[광주 현대 연극]

광복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광주 연극은 학생극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948년 결성된 조선대학교 극예술연구회는 1952년부터 조선대학교 문리학부 교수였던 장용건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2년 제3회 공연 「귀촉도」를 시작으로 1953년 제4회 공연 「뇌우」, 1954년 제5회 공연 「별과 함께 흐르다」, 1955년 제6회 「탈」을 공연하면서 광주 연극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1956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가 전국학생연극제를 개최하면서 학생들이 연극을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전국학생연극제는 광주 연극의 저변을 넓히고 관련 연극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자리가 되면서 지역에 연극을 뿌리내릴 수 있게 하였다. 1965년 최용주가 광주 지역의 학생을 모집하여 만든 광주학생청포도극회가 1969년 제20회 개천예술제에서 단체 최고상을 수상하고, 전국학생연극제에서 수차례 수상할 만큼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광주 지역에서 많은 연극인이 배출되었다.

학생극의 발전과 더불어 1962년 2월 10일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전라남도연합회가 결성되고, 같은 해 2월 17일 전남연극협회가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산하로 발족되면서 연극인을 위한 협회가 만들어졌다. 전남연극협회는 초대 지부장으로 한상운을 추대하면서 한국연극협회 전라남도지부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60~1970년대는 광주 지역 연극인들의 이합집산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프로를 지향한 다양한 극단들이 생겨났지만, Y극회, 극단 시민, 극단 예후만 장기적으로 남았고 나머지 극단은 2~3회 공연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79년 설재록은 광주공원 근처 3층 건물 지하실을 소극장으로 개조하여 '레파토리 소극장'을 개관하였다. '레파토리 소극장'은 객석 100석을 마련한 광주 지역 최초 연극 전문 소극장이었다. 레파토리 소극장에서 광주 지역 극단이 10여 편을 공연하였지만,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러한 시행착오 속에서 광주 연극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극인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1982년 11월 23일 전국 최초 시립 극단인 광주시립극단을 창단하면서 전문 연극인들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시립극단은 특히 1987년 3월 독일 칼스루헤 국립극장에서 최인석 작 「다시라기」를 공연하면서 대외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해외 원정 공연을 마치고, 1987년 5월 광주 공연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광주시립극단의 창단과 더불어 다양한 극단들이 창단되었다. 극단 드라마 스튜디오, 놀이패 신명, 극단 토박이 등은 광주 지역을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박효선전남대학교 연극반 출신들이 모여 만든 토박이는 1989년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170석의 민들레소극장을 개관하고, 농민 문제, 노동 문제를 다룬 민중극과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5월극을 제작·공연하면서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1991년 10월 21일에는 광주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었다. 광주문화예술회관의 개관으로 대극장용 공연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다. 또한, 1975년 막을 내렸던 전국학생연극제가 1990년 광주학생연극제로 다시 부활하였다. 광주학생연극제는 1996년 6회까지 진행되었는데, 1997년에 한국연극협회에서 주관하는 전국청소년연극제에 편입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 광주 지역 극단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2003년 광주 지역 극단을 중심으로 광주공연예술축제를 개최하여 광주 지역 극단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의 극단들이 참여해 광주 일대 소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광주공연예술축제는 2005년 광주평화연극제로 이름을 바꾸고, 2016년에 광주국제평화연극제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매년 진행되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24년 만에 광주시립극단이 재창단되어 매년 2회 이상의 공연을 올리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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