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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12
한자 鄭澈
영어공식명칭 Jeong Cheol
이칭/별칭 계함(季涵),송강(松江),문청(文淸)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6년연표보기 - 정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정철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62년 - 정철 문과 장원급제
활동 시기/일시 1566년 - 정철 형조정랑,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병조정랑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67년 - 정철 홍문관부수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8년 - 정철 이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0년 - 정철 홍문관교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정철 이조정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2년 - 정철 전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5년 - 정철 의정부사인, 홍문관직제학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정철 홍문관응교, 동부승지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정철 대사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정철 강원도 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정철 예조참판, 함경감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정철 예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정철 대사헌, 우찬성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정철 우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정철 좌의정 임명, 인성부원군 책봉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정철 평난공신 책봉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정철 영돈녕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정철 진주 유배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정철 강화도관찰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정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4년 - 정철 신원복관
추모 시기/일시 1684년 - 정철 문청 시호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65년 - 정철의 사당 진천 정송강사(鎭川鄭松江祠) 건립
묘소|단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14-1
사당|배향지 진천 정송강사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봉죽리 562]
성격 문신|시인
성별
본관 영일(迎日)
대표 관직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

[정의]

조선 전기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으며, 광주 지역 등지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시인.

[가계]

정철(鄭澈)[1536~1593]의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자숙(鄭自淑), 할아버지는 정규(鄭潙)이다. 아버지는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동녕부판관(敦寧府判官) 등을 지낸 정유침(鄭惟沈)이고, 어머니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의 딸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형으로는 정자(鄭滋), 정소(鄭沼), 정황(鄭滉)이 있고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부인은 유강항(柳强項)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이며, 정철은 유씨와의 사이에서 정기명(鄭起溟), 정종명(鄭宗溟), 정진명(鄭振溟), 정홍명(鄭弘溟) 등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정철은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입격하고, 그 이듬해인 1562년(명종 17) 별시(別試)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1545년(명종 22)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함경도 정평, 경상도 영일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고,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배소(配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철은 16살 되던 1551년(명종 6) 가족과 함께 창평(昌平)[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할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의 고향이 광주였기 때문에 이곳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정철이 훗날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마다 창평이나 광주 지역으로 낙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철은 1562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지평(司憲府持平)을 시작으로 6조의 여러 관직과 삼사의 언관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566년(명종 21)에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된 뒤에는 을사사화에서 억울하게 화를 입은 인사들의 신원(伸冤)에 앞장섰고 사림들 사이에서 신진 관료로 주목받았다. 명종 사후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 때는 기주관(記註官)으로 참여하였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직을 경험하였다. 특히, 1568년(선조 1)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고 젊은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여 사림 세력 확충에 기여하였다. 1575년(선조 8) 사림이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복제 논쟁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자[동서분당(東西分黨)] 정철은 서인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정철은 계속되는 동인의 공세 속에서도 요직을 유지하였으나, 1580년(선조 13)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어 잠시 중앙을 떠나게 되었다. 정철은 1년 뒤 다시 돌아왔지만, 대신을 경멸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계속되는 모함에 지쳐 창평으로 내려갔다. 2년 뒤인 1582년(선조 15) 정철은 선조의 특명으로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이후 예조참판, 함경감사를 거쳐 1583년(선조 16)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이듬해 율곡 이이가 사망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서인은 계속해서 동인의 압박을 받았다. 다만, 정철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584년에 종1품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었다. 이에 동인은 김우옹(金宇顒)을 앞세워 정철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정철은 다시 창평으로 내려갔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정철의 생애에서 정치적으로 중대한 분기점이 된다. 정철은 이때 호남의 여러 유생을 교사(敎唆)하여 평소에 그와 대척점에 있던 자들을 정여립의 당여(黨與)로 지목해 죽이려 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1590년(선조 23)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단락되어 정철은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고,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년) 왕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동인과 서인이 대립한 이른바 건저의(建儲議) 사건이 일어났으며, 정철은 광해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해 5월 진주로 유배가 결정되어 또다시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유배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은 역설적으로 정철의 정계 복귀를 가능하게 하였다. 선조는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에게 전쟁의 발발 및 패전의 책임을 물어 각각 유배 및 파직 처분을 내렸고, 동시에 유배 중이던 정철의 사면을 허락하였다.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로 임명된 정철은 급하게 의주까지 올라와 왕을 호종하였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의 방략을 세웠다. 하지면 정계 복귀의 기쁨도 잠시, 1593년(선조 26)에 ‘왜군 철수’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체직(遞職)되었고, 그해 12월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철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미암 유희춘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송강집(松江集)』은 1894년(고종 31)에 후손 정운학(鄭雲鶴)이 정철의 유고와 당시까지 간행되지 않은 정철의 글들을 수집하고, 이보다 먼저 발간된 문집(원집 및 속집)의 연보 등을 보완하여 간행한 시문집이다. 전체 11권 7책이며, 원집 2권과 속집 2권, 별집 7권으로 구성되었다. 원집은 1633년(인조 11)에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鄭弘溟)이 펴냈으며, 속집은 1677년(숙종 3)에 이선(李選)이 엮은 것이다.

[묘소]

정철의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다.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정철의 사당인 진천 정송강사(鎭川鄭松江祠)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정철은 사망하고 1년 뒤인 1594년(선조 27)에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624년(인조 2)에 아들 정종명 등의 상소로 관작이 회복되었고 1684년(숙종 10)에 문청(文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는 진천 정송강사는 1665년(현종 6)에 건립된 정철의 사당이다. 건축 이후 크고 작은 개·보수가 있었으나 퇴락하였고, 1979년부터 1981년에 걸쳐 본격적인 중건 작업을 실시하였다.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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