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65
한자 崔漢泳
영어공식명칭 Choe Hanye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보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5월 15일연표보기 - 최한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최한영 광주 3.10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5일 - 최한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최한영 대통령 표창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0년 - 최한영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0년 8월 6일연표보기 - 최한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최한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 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주청년학원 체육부장|5.18민주화운동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한영(崔漢泳)[1899~1990]은 전라남도 광주군[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호남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부동교 아래의 작은장터에서 일어난 광주 3.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광주 3.1운동김강(金剛), 최병준(崔丙浚), 최한영 등이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 학생과 시민 총동원으로 만세 시위를 크게 벌이기로 결의하고 각기 책임 분담을 하였지만, 시위 준비에 차질이 생겨 작은장날인 1919년 3월 10일 전개되었다.

최한영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준비를 담당하였으며, 1919년 3월 10일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고 나서 '광주청년학원'에서 체육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광주 지역의 원로로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최한영은 1990년 8월 6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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