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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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珖秀 |
영어공식명칭 | Jeong Gwang-su |
이칭/별칭 | 정용훈(丁榕薰)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진 |
[정의]
1940~1960년대 전라남도 광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던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
[개설]
본명은 정용훈(丁榕薰)이고, 정광수(丁珖秀)[1909~2003]는 예명이다.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출생하였는데, 정광수의 집안은 대대로 판소리 명창을 배출하였다. 할아버지는 19세기 후반 「심청가」로 풍미한 정창업이고, 일제강점기 때 활약하였던 판소리 명창 정학진은 정광수의 큰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정광수가 본격적으로 판소리 학습을 시작한 것은 1925년 무렵으로 김창환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다. 이후 김봉학에게 「심청가」를 배웠고, 유성준에게는 「수궁가」를 배웠으며,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학습하였다. 그러나 정광수는 스승에게 소리를 학습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판소리 다섯 마당의 사설을 정리하는 등 한학과 판소리 이론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정광수는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국악 교육기관인 광주권번에서 박동실 등과 함께 소리 선생으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광주권번이 광주국악원으로 바뀐 이후에도 강사로 재직하며 제자 육성을 지속하였다.
광주 지역에 사설학원이 활기를 띠던 1950~1960년대에는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1953~1954년에는 전남민속예술학원에서 강사로 활약하였고, 1957년에 재임명되기도 하였다. 잠시 공백기인 1955~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삼남국악원을 운영한 것으로 확인된다. 같은 시기 전남민속예술학원과 쌍벽을 이룬 남도국악원이 광주공원 인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공대일(孔大一)[1911~1990]이 창악 강사로 활약하였다. 1950~1960년대 정광수와 공대일은 경쟁 구도를 이루었는데, 광주에서 판소리를 학습한 사람으로서 정광수와 공대일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두 명창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광주 지역에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박정자, 한해자, 이순자, 정춘실, 방성춘 등도 정광수에게 학습하였던 제자들이다. 다만, 이들이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은 소리는 정광수제가 아니다. 정광수가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시류에 따라 상경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아쉽게도 광주 지역에서 소리를 지속적으로 전승하지는 못하였다.
정광수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후 상경하여 광주 지역에 본인의 판소리를 지속적으로 전승하지는 못하였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큰 위기를 넘어 광주 지역 판소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오늘날 광주광역시의 많은 무형문화재 판소리 명창들이 소리 기반을 닦은 스승으로서 광주광역시 판소리사에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저술 및 작품]
1954년 한덕수와 합편(合編)[두 편 이상의 글이나 책 따위를 합쳐서 한데 엮음]으로 낸 「창극조 대춘향가」와 1986년에 펴낸 사설집 『전통문화 오가사전집(傳統文化 五歌辭全集)』이 있다.
[묘소]
정광수의 장례는 2003년 11월 5일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좌리 선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1995년에는 동리대상 및 KBS 국악대상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