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04
한자 金泰烈
영어공식명칭 Kim Taeyeol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5월 9일연표보기 - 김태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7일~2월 8일 - 김태열 범윤두, 김용규 등과 함께 「2.8독립선언문」, 「독립가」 인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김태열 광주 3.1운동 시위 준비 모임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김태열 박애순, 최병준, 최한영 등과 협력하며 학생 동원
추모 시기/일시 1989년연표보기 - 김태열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태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문잡지 종람소 회원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태열(金泰烈)[1895~?]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須奇屋町)[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출생하였다. 비밀 독서모임인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으로 「2.8독립선언문」과 「독립가」를 각각 인쇄하는 등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광주 3.1운동을 계획하여 선언문을 준비함과 동시에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신문잡지종람소는 보통학교·농업학교 선후배들로 구성된 비밀 독서모임으로 김태열 외에 최한영(崔漢泳), 김복수(金福洙), 김용규(金容奎), 한길상(韓吉祥) 등 10명으로 구성되었다.

[활동 사항]

김태열은 1919년 2월 7일~2월 8일 사이에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면 선암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에 있는 박경주(朴京柱)의 집에서 범윤두(范潤斗), 김용규 등과 함께 「2.8독립선언문」 1500매, 「독립가」 500매를 각각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8일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광주 3.1운동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준비하였다.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崔丙浚)최한영,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 송흥진(宋興眞), 김용규, 손인식(孫仁植), 최정두(崔正斗), 김복현(金福鉉), 김강(金剛), 서정희(徐廷禧) 등이 참석하였다. 비밀 회의 결과, 광주 3.1운동을 추진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짧아서 다시 작은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부동교(不動橋) 부근 넓은 백사장에 작은장이 섰고, 석서정(石犀亭) 앞에 큰장이 섰다. 광주천변의 큰장과 작은장은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장으로 장날이면 호남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장터에는 박경주(朴京柱), 박일구(朴一求), 홍승애(洪承愛) 등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기독교인 및 일반 주민 등 모인 군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김태열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 최한영 등과 협력하며 학생들을 동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3월 10일에서 3월 13일까지 사력을 다하여 시위 군중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시위 군중에게 「독립선언서」 등의 독립 취지를 기재한 격문, 「독립가」, 태극기 등을 배포하고 광주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인파는 시장을 출발하여 시내로 행진하여 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일제는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총칼로 진압하고 무차별 검속을 펼쳤다. 김태열은 이때 붙잡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9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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