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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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顯承詩碑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of Poem for Kim Hyeonseu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진 |
건립 시기/일시 | 1977년 6월 26일 - 김현승시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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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913년 4월 4일 - 김현승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75년 4월 11일 - 김현승 사망 |
현 소재지 | 김현승시비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848-5 |
성격 | 시비 |
관련 인물 | 김현승 |
[정의]
1977년 6월 26일에 전라도 광주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 관음암 입구 도로변에 설치한 시인 김현승(金顯承)[1913~1975]의 시비.
[개설]
다형(茶兄)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김창국(金昶國) 목사의 둘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현승은 아버지의 목회지[광주 금정교회]를 따라 7세 되던 해인 1919년에 전라도 광주로 이주하여 생애 대부분을 광주에서 살았다. 1938년에 양림교회 장로 장맹섭의 딸인 장은순(張恩淳)과 결혼하였다. 김현승은 광주 숭일학교(崇一學校)와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36년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 1946년 숭일중학교 교감을 거쳐 1951~1959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를 지냈다. 김현승은 광주광역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1951년에 지역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여 4호까지 간행하였다. 약 15년간 청장년기를 광주에서 지낸 김현승은 광주를 떠난 후에도 자주 내왕하였다. 1975년 4월 11일 재직 중이던 숭실대학교에서 예배 시간에 기도하던 중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건립 경위]
다형 김현승 시인의 시비는 시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범대순]에서 1977년 6월 26일 무등산 원효사 아래 관음암 입구 도로변에 세웠다. 설계는 박춘상이 하였으며, 비문은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가 썼다.
[위치]
김현승시비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무등산 원효사 아래 관음암 입구 도로변에 있다.
[금석문]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도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