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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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等山-古典文學[散文]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선 |
[정의]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한문으로 기록한 산문 형식의 문학.
[개설]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이 찾은 산으로, 별칭은 서석산이다. 산수 유람을 중시하였던 선조들은 명산을 유람하고 한시, 산문 등으로 본인의 경험을 형상화하였다. 무등산도 많은 사람이 찾아와 유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문으로 기록한 무등산 유람기는 15~16세기로 추정되는 작품을 시작으로, 20세기까지 여러 작품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람기는 무등산 유람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무등산에 대한 인식, 당대의 유람 경로와 유람 과정, 무등산의 명승, 무등산에 전해지는 이야기 등을 남겼다.
[15~18세기 무등산 유람기]
가장 이른 시기의 무등산 유람기는 정지유(鄭之游)[?~?]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이다. 정확한 유람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동생 정지반(鄭之潘)[1464~1517]의 문집 『면와유고(勉窩遺稿)』에 정지유의 「유서석산기」가 덧붙어져 있다. 정지반의 둘째 아들이 소쇄원 옆에 거처한 것이 무등산 유람의 계기가 되었다. 제목에 무등산 유람이 드러나고 무등산 유람의 동기와 무등산의 명승을 서술하고 있는 최초의 무등산 유람기라 할 수 있다.
이후 유람 시기가 명확하고, 양적으로도 풍부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이 있다. 고경명은 광주 목사인 임훈(林薰)의 요청으로, 그와 함께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무등산을 유람하였다. 이 경험을 일기체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이 「유서석록」이다. 전체 4,800여 자로 무등산 유람기 중 가장 많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초창기의 무등산 유람기이면서 담고 있는 내용이 풍부하여, 무등산 유람기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16세기 작품인 고경명의 「유서석록」 이후 17세기에 쓰여진 무등산 유람기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가 있다. 정약용은 1778년에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 머물렀고, 이때 무등산을 유람하였다. 전체 360여 자로 무등산 유람기 중 짧은 편에 속하며, 화순 적벽과 무등산을 대비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정약용은 유람기뿐만 아니라 무등산 유람을 노래한 한시 「등서석산(登瑞石山)」도 남겼다.
[19세기 무등산 유람기]
15~18세기에 3편의 무등산 유람기만이 확인된 반면, 19세기에는 작품 수량이 풍부하여 확인된 무등산 유람기가 9편에 이른다. 1828년에 무등산을 유람하고 기록한 조봉묵(曺鳳黙)[1805~1883]의 「유무등산기(遊無等山記)」, 유람 시기는 미상인 양진영(樑進永)[1788~1860]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1868년과 1870년, 두 차례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나도규(羅燾圭)[1826~1885]의 「서석록(瑞石錄)」과 「서석속록(瑞石續錄)」, 1886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홍삼우당(洪三友堂)[1848~?]의 「서석록(瑞石錄)」, 1891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이연관(李淵觀)[1857~1935]의 「신묘유서석록(辛卯遊瑞石錄)」, 1892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염재신(廉在愼)[1862~1935]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1895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고재붕(高在鵬)[1869~1936]의 「유서석기(遊瑞石記)」, 1898년 무렵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서석산기(瑞石山記)」 등이 19세기에 창작된 무등산 유람기이다.
이 중 무등산 유람기가 2편이 확인된 사람은 나도규가 유일하다. 나도규는 43세 때인 1868년 8월에 2박 3일간 문인들과 무등산을 유람하였고 이를 「서석록」에 기록하였다. 또 45세 때인 1870년 8월에 1박 2일간 종숙 및 마을 어른들과 무등산을 유람하였고 「서석속록」을 남겼다. 무등산의 승경을 유람하면서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기록된 내용을 언급하였는데, 이 내용으로 조선 후기에 고경명의 유람기가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무등산 유람기인 「서석록」은 3,300여 자로 분량도 많고 일기체로 기록하여, 고경명 「유서석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국지사인 송병선은 조선 후기 유기(遊記)[유람하거나 견문한 사실을 기술한 산문 양식의 일종] 문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송병선의 문집인 『연재집(淵齋集)』에는 1866년 4월 황산 등을 유람한 일을 기록한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를 시작으로 1902년 3월에 화양동의 여러 명승을 유람한 일을 기록한 「유화양제명승기(遊華陽諸名勝記)」까지 22편의 유람기가 실려 있다.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서석산기」는 6번째로 실려 있으며, 원효계곡으로 올라간 점이 독특하다. 송병선의 다양한 유람기에서 조선 후기 한반도 곳곳의 대표적 명승 유람 내용을 볼 수가 있다.
[20세기 무등산 유람기]
20세기에도 무등산 유람기는 발견되어, 무등산을 유람하고 한문으로 유람기를 남기는 전통이 근현대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09년에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김운덕(金雲悳)[1857~1936]의 「서석유람기(瑞石遊覽記)」, 1912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양재경(梁在慶)[1859~1918]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1919년 4월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이정회(李正會)[1858~1939]의 「서석록(瑞石錄)」, 1919년 가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조종덕(趙鍾悳)[1858~1927]의 「등서석산기(登瑞石山記)」, 1935년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양회갑(梁會甲)[1884~1961]의 「서석산기(瑞石山記)」, 1957년 무렵의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김호영(金鎬永)[1907~1984]의 「서석산기(瑞石山記)」 등이 20세기에 창작된 무등산 유람기이다.
이외에 유람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 무등산 유람기로 김태석(金泰錫)[1872~1933]의 「서석기(瑞石記)」, 하원순(河元淳)[1858~1924]의 「유서석일기(遊瑞石日記)」, 윤경혁(尹璟赫)[1885~1966]의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 등이 있다. 저자의 생몰년을 바탕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20세기에 유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제목에 무등산이 드러나지 않지만 내용을 볼 때 무등산 유람을 기록한 것으로 확인된 작품으로, 김기숙(金錤淑)[1868~1945]의 「유람일기(遊覽日記)」가 있다. 김기숙은 1933년 5월 5일부터 16일까지의 무등산 유람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