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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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昌模 |
영어공식명칭 | Im Changmo |
이칭/별칭 | 임낙균,월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임창모(林昌模)[1868~1909]는 1868년(고종 5) 전라도 보성군[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오위장(五衛將) 부총관副摠官) 임영수(林英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조양(兆陽)이며, 자는 낙균(洛均), 호는 월담(月潭)이다.
1895년(고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관직에 나간 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7년 3월부터 항일 무장 항쟁을 시작하여 전라남도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1909년 10월 전라남도 보성군 묵석동(墨石洞) 전투에서 아들 임학순(林學淳) 의병장과 함께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임창모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1906년 11월 초 양회일(梁會一)과 회동하여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서 쌍산의소(雙山義所)를 세우기로 하고 군량미 400섬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1907년 3월 7일 안찬재(安贊在) 가택에서 회동하여 의병 조직을 갖추었다. 이때 임창모는 중군장, 의병대장 양회일, 부장 신재의(辛在義), 선봉장 이광선(李光善), 후군장 노응현(盧應玄), 도포장 윤향원(尹香元), 총무 양열묵(梁烈黙), 서기 이병화(李秉華), 참모 임상영(林相永), 호군장 안찬재(安贊在)와 임노복(林魯福), 군의 전신묵(全信黙), 선봉장 정태화(鄭太和) 등 200여 명 규모의 조직을 이루었다.
1907년 3월 9일 쌍산의소 의병부대는 전라남도 화순군 군아(軍衙)와 동복군 헌병파견소를 습격하고 광주군 전라남도 관찰부로 진격하였다. 진격 중 임창모는 도마치(刀摩峙)[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 유마리]에서 적에게 체포되어 광주지방재판소로 압송되었다. 여기에서 유형(流刑) 15년형을 언도받고 신안군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나 1907년 10월 28일 순종황제 즉위 시 특사로 풀려났다.
1908년 2월 임창모는 다시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석호산(石虎山)에서 의병 500여 명을 모았다. 그해 3월 26일 안규홍(安圭洪)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벌여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파청(巴靑)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보성군 문덕면 귀산리 진산(眞山) 전투에서도 개가를 올렸다. 그 뒤로도 5월 1일 보성군 문덕면 대원사(大原寺) 전투, 5월 12일 장흥군 장평면과 화순군 청풍면 사이에 있는 웅치(熊峙) 전투, 5월 18일 보성군 복내면 원봉(圓峰) 전투, 5월 19일 보성군 복내면 서봉산(棲鳳山) 전투, 5월 25일 보성군 득량면 박곡(亳谷) 전투, 6월 25일 고흥군 동강면 마륜(馬輪) 전투, 7월 21일 화순군 사평면 전투, 8월 3일 보성군 회천면 청포(靑浦) 전투, 8월 12일 고흥군 도화면 당곤(堂昆)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에는 4월 24일 동복군 사평장(沙坪場)과 낙안군 우산촌(牛山村)에서 능주수비대를 격파하고, 5월 12일 보성군 이수장(梨樹場)에서 다카기[高木]·히로히다[廣煙]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어 9월 1일 보성군 문덕면 죽산(竹山)에서 광주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09년 10월 13일 의병 230여 명을 이끌고 보성군 복내면 일봉리 묵석동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아들 임학순 의병장과 함께 전사하였다.
[묘소]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용문리 주음마을 동산에 임창모와 아들 임학순이 함께 안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