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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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國唯一-單館劇場光州劇場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준 |
[정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광주극장의 역사.
[개설]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에 있는 광주극장은 1935년 10월 10일 첫 상영 이후 2021년 현재까지 86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으로, 객석은 856석 규모이며, 상영 스크린이 하나뿐인 단관 극장이다.
[광주극장의 역사]
1933년 민족자본가 최선진(崔善鎭)[1891~1945]을 대표로 광주극장 설립을 위한 법인 설립 이후 1935년 10월 1일 광주극장이 완공되었다.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입장 관객 정원 1,200명으로 조선 제일의 대극장으로 기록되었다. 광주극장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만든 공연장을 의미하는 ‘좌(座)’ 또는 ‘관(館)’이라는 호칭 대신에 '극장(劇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모든 영화의 상영 극장은 일본 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한다는 지침을 명시하였다. 이 때문에 1935년 10월 10일 광주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영화는 일본 협동영화사에서 제작한 발성영화 「일상월상(日像月像)」이었으며, 하루 중 한 번 조선인 관객을 위해 변사를 동원해 우리말로 해설하였다.
1935년은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한 해였다. 당시 민중들은 무성영화가 아닌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광주극장은 일본 쇼치쿠[松竹] 영화사와 계약을 맺고 영화를 상영하였다. 또 일본 활동사진 주식회사의 작품을 상영하고 그 밖의 일본 영화사와 계약 체결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1940년 최선진이 극장 전무이사였던 최동복을 일본으로 보내 영화 시장을 답사하게 한 일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같은 운영은 일본의 영화 산업 확대에 따른 선택으로 풀이되며, 일제강점기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수익사업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938년 광주극장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이름을 알린 판소리 명창 김석구의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독창회는 악기점[남해당]을 운영하는 김준실의 기획이었는데, 김준실은 최선진에게 광주극장 사업을 제안하였던 인물이다. 또 1943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무용수 최승희(崔承喜)[1911~1969]의 춤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7일 11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위원회 결성식이 광주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이듬해 1946년 김구와 조봉암이 참석한 전남 삼균학회(三均學會) 학사(學舍) 개소식을 거행하면서 광주극장은 자주적 국가 수립을 위한 시대적 과제가 논의되었던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 이후 38도선 이남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0월 21일 저녁 7시경 광주극장에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을 규탄하는 「사탕가루보다 쌀을 배급하라」, 「언론기관 탄압을 배격하고 언론기관을 수호하자」 등의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 전단이 살포되었다. 1948년 12월 24일 오전 10시에 미국 공보원 문화연구소 주최로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1949년 1월 서울에서 진행되는 본선에 출전할 전라남도 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였으며, 30여 명이 신청하였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민주주의 생활 방식'이었다. 광주극장은 문화를 통한 미국 문화의 침투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광주극장은 전선의 소식통 역할과 기능을 하였다. 1952년 4월 10일부터 광주극장은 주야간 전쟁 뉴스를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68년 1월 18일 광주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당시 『매일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화재는 전선 도난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무대 밑에 있는 모터(motor)를 누군가 훔쳤는데, 이로 인하여 새벽 4시경 지하실과 무대 쪽에서 불꽃이 발화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화재는 광주극장 건물을 모두 태워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2대 운영자 최동복에게 극장 재건축을 만류하고 업종 전환을 권고하였지만, 최동복은 가업 계승을 위해 재건축을 시작하고 8개월 만에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되찾아 1968년 10월 4일부터 다시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극장은 1층 스크린 뒤에 공연예술 연기자를 위한 분장실과 대기실을 갖추었는데, 그곳에서 공연 단원들은 숙박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2층 벽면 양쪽에 무대를 비추는 조명 시설까지 갖췄다. 무대 뒤편의 공간과 조명실의 배치는 1960년대 후반에도 공연예술이 광주극장의 프로그램 일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설이었다. 동시에 광주극장이 지역민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지 공론장으로 전용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광주극장의 재개관은 1967년 대중들에게 흥행한 「팔도강산」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제1회 남도영화제에서 희극배우상을 받은 김희갑을 내세운 극장 공연과 함께 이루어졌다.
[광주극장 현황]
근래 영화관들이 거의 복합상영관(multiplex)으로 바뀌는 가운데에도 광주극장은 단관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예술영화·독립영화·제3세계 영화 등을 상영하는 등 특화된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광주의 많은 영화관이 대형 자본을 앞세운 복합상영관에 밀려 사라졌던 것과 달리 광주극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우리나라 25개소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중 하나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극장 주변에 자리한 ‘영화의 집’에서는 문화·예술 강좌도 진행 중이며, 매년 광주극장의 탄생을 기념하는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 광주극장영화제에서는 광주광역시 출신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을 개막작으로 모두 16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제7회 광주비엔날레와 제13회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