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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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5.18-記錄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독일 언론인.
[개설]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1937.7.6.~2016.1.25.]는 독일인으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상황을 듣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택시를 이용해 광주에 잠입하여 당시 상황을 취재하였다. 취재 필름은 일본 나리타[成田] 국제공항을 통해 독일로 보내졌고, 1980년 광주 상황을 전 세계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1986년 11월 광화문 시위 장면을 취재하다 큰 부상을 입고 1995년 은퇴하였다.
[경력]
위르겐 힌츠페터는 1963년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 함부르크 지부의 카메라맨으로 입사하였다. 입사 후 1967년 초 홍콩 동아시아 지부로 발령받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였고, 1973년 일본 도쿄[東京] 지부로 발령받게 되어 1989년까지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위르겐 힌츠페터는 1974년 9월 26일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을 취재하기도 하였고, 박정희 정권 당시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가택 연금 중이던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을 녹음하기도 하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하여 독일 제1공영방송 저녁 8시 뉴스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이후에도 특파원 신분으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였으며 1986년 11월 광화문 시위를 취재하기도 하였다. 5.18민주화운동 취재 공로로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하였고, 2005년 한국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활동 내용]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위르겐 힌츠페터는 "대한민국 계엄령 하에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이 충돌하고 있다."라는 짤막한 일본 언론 보도를 듣게 된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한국 정부의 계엄령 선포 등을 미루어 봤을 때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 같은 방송국 녹음 담당 기자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 1980년 5월 19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당시 외신 기자들은 한국에서 취재하기 위해 해외홍보원[KOIO]에 신고를 해야 했으나, 광주 취재 자체를 허가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하여 신고를 하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오전, 택시를 이용하여 광주로 잠입하였다. 광주로 통하는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그 장면을 촬영해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로 가는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제지당했고, 작은 마을의 청년들이 탄 트럭에 올라타고 광주 시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때 종군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민주화운동만큼 비참한 광경을 처음 본다고 말했을 정도로 광주의 상황은 끔찍하였다. 훗날 위르겐 힌츠페터는 시민 학살 현장과 부상자들이 가득한 병원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에 영상을 담는 내내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 가끔은 촬영을 중단하기도 하였으며, 촬영을 계속해야 하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결과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이 고스란히 위르겐 힌츠페터의 필름에 남아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팀 원버그(Tim Warnberg),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쥬디 챔벌레인(Judi Chamberlin) 등 광주에서 체류하고 있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들을 만나 사태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 전해 듣기도 하였는데, 당시 팀 원버그·폴 코트라이트·쥬디 챔벌레인 등과 함께 건물 옥상에서 찍힌 사진이 남아 있다.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는 만 하루 동안 취재를 진행한 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광주를 빠져나왔다. 공항에서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필름 일부를 허리띠에 넣고, 나머지 일부는 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Royal Dansk)사의 파란색 버터 쿠키 통 속에 숨겼다. 1980년 5월 22일 오전 위르겐 힌츠페터 혼자 광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갔으며, 필름은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곧장 독일로 보내졌다. 검문을 뚫고 가는데 시간이 지체되어 1980년 5월 21일 밤 11시에 다시 서울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는 5월 23일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틈을 타 다시 광주로 잠입하였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김제에서 택시를 타고 갔으며, 외국 회사 주재원으로 위장하여 광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광주에 도착한 위르겐 힌츠페터는 시민자치 상황의 모습을 추가로 촬영하였다. 추가 촬영된 필름 속 광주는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서의 규탄 대회, 평온했던 시민들의 일상, 광주 상황을 보도한 외국 신문을 붙여두고 관심 있게 지켜보는 모습, 물자 부족이나 약탈 없이 음식이 가득한 시장, 시민군 활동, 협상을 성공시키기 위해 애쓰는 수습위원회 위원들의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5.18민주화운동 영상 장면은 대부분 이때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 보도한 '폭도가 점령하여 아비규환이 된 광주시내'와 같은 계엄군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 영상이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두 번째 취재 자료를 독일로 보낸 후 1980년 5월 27일 다시 광주로 들어갔으나 이미 계엄군의 강제 진압이 끝난 상태였다.
1980년 5월 22일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독일로 보내진 위르겐 힌츠페터의 필름은 5월 22일 저녁 독일 제1공영방송이 당시 서독 전역에 동시 송출하던 저녁 8시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최초 보도되었으며, 5월 23일 추가 촬영한 필름까지 보태 후속 보도까지 방영되었다. 9월에는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을 바탕으로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이라는 45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취재를 바탕으로 한 이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한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녹화한 뒤 번역 작업을 거쳐 다른 신부들에게 몰래 전달하여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위르겐 힌츠페터의 취재를 비롯한 '광주 비디오'들은 언론 통제를 하는 제5공화국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고 광주의 참상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침묵하고 왜곡하는 언론의 현실 속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외신 기자들 덕분이었다. 위르겐 힌츠페터 이외에도 프랑스 『르 몽드(Le Monde)』 기자 필리프 폰스(Philippe Pons), 미국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서울 주재 기자 심재훈은 광주의 상황을 취재하여 본국으로 원고를 보냈다. 미국과 유럽에서 영향력이 큰 두 매체에서 소식이 보도되자 계엄당국에 비판의 여론이 쏟아졌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노먼 소프(Norman Knute Thorpe) 기자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국민을 보호하는 일인데 자국민들을 이렇게 죽이는 것은 학살이며, 이를 은폐하고 거짓말 하는 정부는 더욱 부도덕하다." 라고 말하였다. 위르겐 힌츠페터를 포함한 외신 기자들은 5.18민주화운동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대한민국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만약 위르겐 힌츠페터와 같은 외신 기자들의 노력과 기록이 없었다면, 광주시민들의 억울한 희생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건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1986년 11월,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중 사복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여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독일에서 병원 생활을 했으며 1995년 은퇴하였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했고, "내가 한 취재 중 1980년 5월의 광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늘 말하였다고 한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아내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의 증언에 따르면, 수술 후 섬망(譫妄) 증세를 보일 때 광주에서 봤던 군인의 모습을 환각으로 보았다고 한다.
2004년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일시적으로 생명이 위독해진 위르겐 힌츠페터는 "죽으면 광주에 나를 묻어달라."는 소망을 밝혔고, 이에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및 광주광역시 등 여러 단체들이 명예 시민증 부여, 국립5.18민주묘지 안장을 추진하였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였고, 2005년 5.18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모발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를 5.18기념재단에 전달하였다.
2016년 1월 25일, 위르겐 힌츠페터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주에 묻어달라."는 생전의 유언에 따르려 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위르겐 힌츠페터의 모발과 손톱, 유품을 담은 항아리를 비석과 함께 5.18구묘지 입구에 안치했으며, 정식 안치 행사는 2016년 5.18 기념식 때 진행되었다.
[가족 관계]
위르겐 힌츠페터의 아내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여하여 위르겐 힌츠페터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의의 및 평가]
2005년 4월 15일, OBS 이수강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위르겐 힌츠페터는 "나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광주를 떠올린다. 당시 광주시민들이 무엇을 이야기했고, 무엇을 위해 죽어갔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특정한 지도자의 역량이 아닌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고 말했을 만큼 광주를 사랑했던 언론인이었다. 위르겐 힌츠페터의 이야기는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2017년 개봉하였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었던 영상들을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가 2018년 5월 17일 개봉하였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용감하고 진실된 보도로 인해 5.18민주화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공로로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자 겸 유일한 외국인 수상자가 되었으며, 2005년 한국카메라기자협회 특별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