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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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武兼備-忠臣高敬命 |
이칭/별칭 | 이순,제봉,태헌,태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임진왜란 때 활약한 광주 출신의 충신.
[시대적 상황]
임진왜란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을 말한다. 일본이 1차로 침입한 해가 임진년(1592)이므로 ‘임진왜란’이라 하며, 2차 침입은 정유년(1597)에 일어났기 때문에 ‘정유재란’이라 일컫는데, 보통 이 두 차례의 침입을 모두 포함하여 ‘임진왜란’으로 통칭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조선왕조의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기본으로 하였다. 중국 명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지속하는 사대정책을 펼쳤고, 중국 이외의 국가와는 평화적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한정된 장소만을 개방해 제한적 범위의 무역만을 허용했으며, 대마도 정벌과 같이 무력 행위를 병행하는 회유와 토벌이 기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은 더 많은 무역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조선은 오히려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을 취하면서, 삼포왜란(1510)이나 을묘왜변(1555)과 같은 양국 간의 마찰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였다.
한편, 이즈음 조선은 내부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훈구(勳舊)와 사림(士林) 간의 대립이나 네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의 발생 등으로 정치 기강은 흔들리고 있었고, 토지 제도의 변질, 수취 체제의 붕괴는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치게 하였다. 노비쇄환령(奴婢刷還令)에서 비롯된 옥비(玉非)의 난(1583)을 비롯해 정치 일선에 있는 자들은 물론 일반 서민들까지도 연루된 정여립의 모반 사건(1589) 등은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즉, 16세기의 조선은 나라 안팎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가계]
고경명은 1538년(중종 28) 11월 30일 전라도 광산군 유곡면 압보촌[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압촌동]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호조참의(戶曹參議) 등을 역임했던 고맹영(高孟英)과 진사 서걸(徐傑)의 딸인 남평서씨(南平徐氏)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태헌(苔軒)·태사(苔槎)로, 장흥(長興)을 본관으로 한다. 어려서부터 풍채가 당당하고 식견이 높았던 고경명은 1552년(명종 7)에 약관의 나이로 진사와 생원 시험을 모두 통과하였으며, 이로부터 6년 뒤인 1558년(명종 13) 식년시에서는 갑과 1위를 차지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고경명은 1553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역임하고 있던 김백균(金百鈞)의 딸인 울산김씨(蔚山金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활동 사항]
1558년 문과에 합격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 등 삼사(三司)의 관원을 거치며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특히 1560년(명종 15)에는 당시 홍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이었던 정유길(鄭惟吉)의 추천으로 명종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아 학문에 몰두하였다. 사가독서제는 관료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주기 위해 휴식 기간을 부여하고 독서와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한 일종의 ‘유급휴가제도’이다.
명종[재위 1545~1567]은 고경명을 매우 신뢰하였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62폭의 그림을 고경명에게 보여 주면서 이에 대한 시를 남겨 줄 것을 명할 정도였다. 그 결과가 고경명의 문집인 『제봉집(霽峯集)』에 남아있는 ‘응제어병육십이영(應製御屛六十二詠)’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그림에 대한 해설과 그 소회를 남긴 이 62수의 작품은 고경명 문장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비교적 순탄했던 고경명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1563년(명종 18)에 돌연 울산군수(蔚山郡守)에 보임되어 외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였던 이량(李樑)과 관련이 있다. 이량은 명종의 왕비였던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부였는데, 이러한 지위를 믿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량의 전횡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처 방안과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홍문관 교리로서 참석한 고경명이 논의의 과정을, 장인 김백균을 통해 이량에게 알렸다는 의심을 받고 좌천된 것이다. 이에 울산군수로의 발령 소식을 접한 고경명은 부임을 거부하고 귀향길을 선택하였다. 고경명의 나이 31살 때였다.
귀향을 결정한 고경명은 약 20여 년 동안 고향에 은거하며 스스로 ‘사가독서’를 실천하였다. 광주목사 임훈(林薰) 등과 함께 5일 동안 서석산(瑞石山)[무등산의 옛 이름] 일대와 소쇄원(瀟灑園)·식영정(息影亭)·환벽당(環碧堂) 등의 누정을 돌아다니며 그 소회를 기록한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작성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1574). 이처럼 고경명이 광주 일대의 이름난 명소를 누비며 자적(自適)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조정에서는 선조가, 과거에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관직을 빼앗고 수도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된 자들의 근황을 물은 적이 있는데, 이때 고경명이 언급되었다. 조정에서는 아직 고경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중대사를 함부로 발설했다는 예전의 정치적 과오가 고경명의 조정 복귀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고경명이 다시 왕실의 부름을 받은 것은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낙향한 지 18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의 서장관(書狀官)에 뽑혀 명나라에 다녀온 것이다. 이 사신 파견은 조선의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사절단을 진두지휘했던 김계휘의 직함 ‘종계변무주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에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정치적으로 도태되어 명으로 도망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성계를 또 다른 정적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명의 『태조실록(太祖實錄)』이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의 자료에 그대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에서 『대명회전』의 중찬 작업이 거의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이 급하게 김계휘를 중심으로 한 사절단을 파견하여 이성계의 가계 문제를 바로잡으려 한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고경명이 문장으로서 이름난 인물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사행 중 일어난 사건을 소상히 기록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서장관의 역할을 고려했을 때 사절단 발탁에 따른 성공적인 임무 수행은 고경명의 정치적 복권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중대한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조정에 복귀하였지만 고경명은 그 이후 영암군수(靈巖郡守)나 동래부사(東萊府使)와 같은 외직을 맴돌았다. 이 무렵 조선은 관원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전랑(吏曹銓郎)의 문제를 놓고 사림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려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고경명은 이 가운데 송강 정철(鄭澈), 율곡 이이, 황강 김계휘 등을 비롯하여 주로 서인계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서인의 영수 정철과는 폭넓게 교류하면서 친분이 있었던바,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1583년(선조 16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복귀 후 불과 2년 만에 재차 낙향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고경명]
낙향하여 줄곧 광주에서 살았던 고경명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에 의해 경상도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고, 이로 인해 임금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김천일(金千鎰), 박광옥(朴光玉), 정심(鄭諶), 최경회(崔慶會) 등 당시 호남 일대의 유력자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해 5월 29일에 담양의 추성관(秋城館)에서 출정식을 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병 활동에 들어갔다. 단지 군사를 모아 일본군에 맞서는 일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각지에 격문을 띄워 구국을 위한 의병 행렬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 호소문들은 「격제도서(檄諸道書)」, 「격도내서(檄道內書)」, 「통제도문(通諸道文)」 등의 제목으로 『제봉집』에 실려 있다.
6월에 태인(泰仁)을 거쳐 은진(恩津)까지 북상했던 고경명의 군대는 일본군이 호남에 진출한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다시 남하하여 금산(錦山)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월 9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군대와 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첫 격돌에서 고경명이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인솔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고 이에 일본군 수천 명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초전(初戰)의 승리로 기세가 올랐지만 큰아들 고종후(高從厚)는 일본군의 야습에 대비해 군을 일단 물릴 것을 건의하였으나, 고경명은 아들이 자신의 죽음을 염려하는 모습에 단호히 반대하며 의연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의 야습은 일어났고, 관군은 형편없이 무너졌으며 의병군만으로 일본군을 맞서기에는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결국 고경명은 이 금산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종후(高因厚)을 비롯하여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김덕홍(金德弘), 신응하(申應河), 이억수(李億壽)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고경명의 7대 후손인 고정헌(高廷憲)이 1800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따르면,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의 어느 여름날 하늘을 보고는 “금년에 장성(將星)이 불길하니 장차 반드시 이롭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고경명은 이미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목숨을 내놓을 것을 다짐했던 것이다. 고경명의 의병군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최대 규모였고, 의병군의 수장 고경명은 호국(護國)을 위해 특유의 문장력을 발휘해 조선 각지를 격동시켰다. 조정에서는 고경명의 이러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경명의 순절 이후 사우를 건립하고 시호를 내려주는 등 추숭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영조 대에는 부조지전(不祧之典), 즉 사당에 신주(神主)를 영구히 모시게 하는 특전을 받기에 이르렀다(1771).
고경명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의향(義鄕)으로서의 ‘호남’을 이야기할 때 고경명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이는 바로 위와 같은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고경명은 의병장이기 이전에 철저한 ‘문인’이었다. 이항복(李恒福)은 『제봉집』의 서문에서 “세상에는 남쪽 지방에 시인들이 많으나 고제봉이 제일이라고 말한다”[世言南中多詩人 高霽峯爲之雄鳴]라고 쓸 정도였다. 따라서 고경명은 당시에 호남 일대의 문학을 대표한 인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율곡 이이(李珥) 역시 고경명의 글짓기에 감탄하여 고경명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을 정도였다. 이처럼 고경명은 문·무를 겸비한 충신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