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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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之孝 |
영어공식명칭 | Park Jihyo |
이칭/별칭 | 자경(子敬),오류(五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미선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11월 24일 - 박지효 남평현감 서리(署理) 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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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박지효 모병유사(募兵有司) 부임 |
출생지 | 서창(西倉) -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남평현감 서리(署理)|사복시정(司僕寺正)|모병유사(募兵有司) |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정묘호란 당시 활동한 전라도 광주 출신 의병.
[가계]
박지효(朴之孝)[?~?]의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오류(五柳)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증좌찬성(贈左贊成) 박지흥(朴智興)이고, 아버지는 만호(萬戶) 박대수(朴大壽)이다.
[활동 사항]
박지효는 광산 서창(西倉)[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서 태어났으며,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음직(蔭職)으로 감찰(監察)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고경명과 함께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했으나 고경명은 박지효의 늙은 부모를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때마침 남평(南平)현감 한순(韓楯)이 군대를 거느리고 전라도 광주에 이르렀다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여 남평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선비들이 박지효를 감사 이시백(李時白)에게 천거하여 1592년 11월 24일부터 임시로 남평현감을 맡아 서리(署理)하게 되어 홍민언(洪民彦)과 함께 병량을 모으고 남평을 지켰다. 난이 진정된 이후에도 1594년 1월 5일까지 남평현감으로 재임하였고, 얼마 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의 관직에 이르렀다.
박지효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부름을 받아 75세의 나이로 모병유사(募兵有司)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로 이동하였고, 당시 전주에 피란 중인 세자를 여산(礪山)까지 호송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