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10 |
---|---|
한자 | 孔大一 |
영어공식명칭 | Gong Dae-il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진 |
출생 시기/일시 | 1911년 1월 17일 - 공대일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 공대일 「흥보가」|「춘향가」 학습 |
활동 시기/일시 | 1940년 - 공대일 동일창극단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5~1946년 - 공대일 광주성악연구회|창극단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50~1960년대 - 공대일 호남국악원|전남민속예술학원 등에서 제자 육성 |
몰년 시기/일시 | 1990년 2월 4일 - 공대일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 공대일 남도판소리 보유자 인정 |
출생지 | 추동마을 -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의 옛 이름] 송광면 월산리 |
거주|이주지 |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297번지 |
활동지 | 호남국악원 - 광주광역시 사직공원 인근 |
활동지 | 광주권번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21번지 |
묘소 |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의 옛 이름] 송광면 |
성격 | 국악[남도판소리]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권번|전주권번|정읍권번|호남국악원 창악 강사 |
[정의]
1940년대 이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남도판소리 보유자.
[활동 사항]
공대일(孔大一)은 1911년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의 옛 이름] 송광면 월산리 추동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팔촌 형이 공창식이고 임방울과는 사돈지간이다. 결혼 후 광주부 천정리 157번지[현 광주광역시 양동]에서 거주하였고,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297번지에서 1990년 2월 4일 사망하였다.
공대일은 팔촌 형 공창식에게 15세 때부터 「흥보가」, 「춘향가」를 학습하였다. 그 후 박동실에게 「심청가」를 사사 받았다.
1940년 동일창극단을 비롯해 1945~1946년 시기에는 광주성악연구회 및 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고, 8.15 광복 후에는 광주 지역의 많은 명창들이 상경하는 상황에서도 광주 지역에 머무르며 판소리 전승에 힘을 쏟았다. 특히 판소리 명창으로서의 활동보다는 교육자로서 광주 지역의 판소리 지속·전승에 기여하였다. 광주권번, 전주권번, 정읍권번 등에서 쌓은 교육 경험을 기반으로 1950~1960년대 호남국악원, 전남민속예술학원 등을 오가며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같은 시기에 함께 사설 학원의 창악 강사로 활동하였던 정광수(丁珖秀)[1909~2003]와 쌍벽을 이루었다. 공대일에게 학습하였던 이는 송순섭·성창순·김성권·김향순·최연자·이영애 등 오늘날 국가 및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로 활동하였거나 활동 중인 유명한 명창들이 상당수이다.
공대일의 소리는 완판보다는 도막소리를 중심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에 완판 지향의 현대의 판소리 전승 구도에 편승하지 못하여 지역의 명창으로만 머물렀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공대일의 판소리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매우 뛰어나 정광수보다 인기 많은 강사였다. 특히 단기간 학습으로 협률사 등의 입단을 목적으로 삼았던 여성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만큼 급성장할 수 있을 정도로 소리를 잘 가르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많은 명창들이 지역을 떠나던 시기에도 광주 지역에 남아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오늘날 국가 및 시도의 판소리를 지키는 많은 명창들의 젊은 시절에 소리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광주 지역 판소리사에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남도판소리 보유자가 되었다.
[저술 및 작품]
공대일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바탕을 전부 불렀으나 주로 도막 소리였으며, 그나마 긴 소리에 해당하는 것이 「흥보가」, 「심청가」이다. 본격적인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화순 일대에서 고사소리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공대일의 고사소리는 이보형 채록 「고사소리」에 수록되어 있다.
[묘소]
전라남도 승주군[현 순천시의 옛 이름] 송광면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