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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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橋梁 |
영어공식명칭 | Bridge |
이칭/별칭 | 다리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명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강이나 하천을 경계로 떨어져 있는 지형과 지물 사이를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인공 구조물.
[개설]
광주광역시에 가설된 교량은 총 424개로 고속국도 교량 70개[총 연장 7.2㎞], 일반국도 교량 45개[총 연장 5.8㎞], 광역시도 교량 189개[총 연장 25.2㎞], 지방도 교량 26개[총 연장 2.1㎞], 구도 교량 94개[총 연장 6.6㎞]로 총 연장 46.9㎞에 달한다. 각 소재지별로는 동구에 45개소, 서구에 35개소, 남구에 35개소, 북구에 65개소, 광산구에 165개소, 전라남도 장성군에 8개소가 광주광역시 직할 소속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중 인도전용 교량 13개를 제외한 모든 교량이 차량통행용 교량이다. 1종교량이 64개, 2종교량이 66개, 소교량이 222개로 각구[동구, 서구, 남구, 북구, 광산구]의 구청과 광주광역시 소속 종합건설본부와 제2순환로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주 다리의 역사]
과거 광주의 다리 기능을 하던 구조물들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650년대인 효종 때 발행한 『광주읍지』와 1699년(숙종 25)에 만들어진 『광주목지』, 1760년(영조 36)에 발행된 『조선읍지 종합편여지도서』, 1792년(정조 16)에 발행된 『광주읍지』, 1879년(고종 20)에 발행된 『광주읍지』, 1894년(고종 35)에 발행된 『광주읍지』, 1924년 발행된 『광주읍지』, 1966년에 발행된 『광주시사』 등을 살펴보면 다리의 이름과 그 다리가 주의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만 기술되어 있을 뿐, 다리와 관련된 이야기나 다리의 모양 및 제원들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기록이 소실된 것인지, 기록이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신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다리의 모양이나 제원들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광주 다리 역사의 공식적인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아쉽게도 과거 다리의 기능을 하던 돌다리나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구조물들은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 형태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그 모습과 제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무거운 통행수단들을 버틸 수 있는 현대의 교량 가설기술이 도입되었고,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교령이 매우 오래된 근대식 다리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광주의 다리가 광주라는 지역에 얽힌 많은 역사를 안고 있고, 사람들에게 불리는 비공식적인 다리의 이름과 전설, 소문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와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광주의 역사와 광주의 다리의 연관은 지엽적이라고 볼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노지다리]
약 100여 년 전 시작된 광주 다리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다리는 노지다리이다. '노지'는 광주의 옛 이름으로, '노지다리'는 과거 광주천에 놓여 있던 다리 중 규모가 큰 유일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과거 '사동의 최부잣집' 앞 일대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지금의 광주 지형과 과거의 광주 지형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최부잣집에서 광주천이 약 100m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다고 한다. 노지다리는 굵은 나무로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잔나뭇가지와 흙을 덮어 만든 흙다리였다.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다리들은 이런 흙다리였는데, 노지다리는 기록에 남은 유일한 흙다리이다. 교량이 가설되고 폐설되기를 반복하던 시기에 노지다리는 1910년까지 남아 있었다. 이후 광주천의 유로가 사동에서 불로동 쪽으로 붙어 흐르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노지다리였던 자리가 택지로 변모하였다.
[광주교]
광주교는 1907년에 가설된 광주 최초의 근대식 다리였다. 광주교는 과거 광주교 인근에 광주공원이 있어 '공원다리'라고도 하였다. 광주교는 처음에는 목재를 사용한 목교였으나, 구조적으로 약해 매우 위험한 다리였다. 1935년 광주교가 철근 콘크리트로 재가설되면서 현재 모습에 가까운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때 광주교의 연장이 약 100m에서 약 60m로 짧아졌는데, 구불구불하던 광주천 유로가 1920년대 시행된 개수공사를 통해 직선형 하천으로 바뀌었고, 구불구불하던 유로가 상당 부분 매립되면서 교량의 연장이 짧아진 것이다.
[광주대교]
1928년 콘크리트로 가설된 광주대교는 가설 초기에는 옆에 놓인 광주교와 구분하기 위해 '신광주교'라고 불렀다. 190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의 관문 역할은 충장로3가에 자리한 북문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대에 들어서 충장로의 시가지가 4~5가로 확장되면서, 지금의 남구 사직동과 동구 충장동, 서구 양동 등의 지역과 광주천 좌안을 이을 수 있는 새로운 교량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송정리와 나주 방면을 잇는 도로 교차점[현 월산사거리]과도 여전히 연계될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너무 북쪽인 것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광주교 인근에 새로운 교량을 가설하는 것이었다.
또한 1920년대에 광주역이 준공 및 개통되면서 새로운 도시공간의 개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광주역 정면을 잇는 도로가 필요하였고, 그 도로를 이어 광주천을 건널 수 있는 새로운 교량이 필요하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로를 조성하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일이다. 그러한 이유로 1928년 광주대교가 먼저 가설되고, 광주역의 정문을 잇는 도로[현 구성로]는 1921년부터 공사에 착수해 1963년에 개설될 수 있었다. 이렇게 광주의 중심역과 도로를 잇는 광주대교는 광주의 관문을 상징하는 교량이 되었다.
[배고픈다리]
과거에 배고픈다리는 학운교와 홍림교, 둘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어떤 교량을 배고픈다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1979년 교량이 가설되고 인근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공식적으로 홍림교로 명명하게 되었다. 과거 홍림교가 배고픈다리로 불리게 된 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조선시대에 가설된 홍림교에 들어간 돈이 105푼이었다는 설, 두 번째로 다리의 중앙이 움푹 들어가 배가 고픈 형상을 하였다는 설, 세 번째로 6.25전쟁 때 이곳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군인들이 항상 배고파하던 모습을 따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이와 같이 그럴듯한 설들이 많고, 정확히 "이것이 배고픈다리라고 불리게 된 유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나, 우리 민족의 배고프고 가난한 역사를 담고 있는 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뽕뽕다리]
광주시의 인구 수는 195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는데, 광복 직후 10만 명 정도였던 인구수가 1950년대 막바지에는 3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다. 이후 증가율이 완만한 곡선으로 진입하지만, 파도처럼 물밀듯이 들어오는 전입인구를 막을 수 없었던 광주시의 인구는 199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도시화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광주시는 유입해 오는 인구를 감당하면서도 심각한 도시문제에 직면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광주시의 현실을 반영한 대표적인 교량이 뽕뽕다리이다.
뽕뽕다리의 재료는 PSP강판 혹은 유공강판(有孔鋼板)으로 불리는 철판이다. PSP강판은 원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스콜이 심하게 발생하는 태평양 지역에서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철판에 구멍을 내서 비행활주로의 포장재로 썼던 것이었다. 6.25 전쟁 이후 돈이 없었던 우리나라는 미군이 사용하던 중고 철판을 수입해 교량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교량이 가설된 후 사람들은 다리의 뽕뽕 뚫린 구멍을 보고 ‘뽕뽕다리’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뽕뽕다리는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역사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다수가 폐설되고 새로 세워져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나, 방림교, 임동 뽕뽕다리 등이 인근 주민들의 청원과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준공되었다. 새로 가설된 뽕뽕다리는 과거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시민들의 문화체험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농장다리]
농장다리의 정식 명칭은 동지교이다. 그러나 이곳[동명2동 200번지] 지역 사람들은 동지교라는 이름보다는 농장다리로 더 많이 부른다. 100여 년 전 동명2동 200번지에는 광주교도소[1908년 건립]가 있었는데, 당시 광주교도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들은 대부분 의병활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이었다. 광주교도소는 1971년 이전까지 재소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 채소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이때 재소자들이 노역을 위해 농장을 오고가면서 건너던 다리에 붙인 이름이 농장다리였다고 한다.
[기타 다리]
금교: 과거에 남도극장과 사직공원 입구에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금교라고 불렀다. 금교는 1910년대에 가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1920년대 광주시 내의 개수공사의 산물로 가설된 다리이다. 과거 이 일대에서 광주천을 '금계'라고 불렀던 것에 유래하여 금교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부동교: 과거 적십자병원이 있던 자리 앞 서석교와 중앙대교 사이에 있던 다리로 '불로동다리'라는 이칭을 가지고 있다. 불로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부동방면으로 불렀고, 일제강점기에는 부동정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유래하여 교량명이 붙여졌다. 부동교 또한 1920년대 개수공사의 산물로 가설된 다리이다.
[참고 자료 인용 관련]
2019년 광주광역시청에서 제공하는 『2019 도로 및 교량 현황 조서』에 따르면 광주광역시에 설치된 교량의 수는 육교 13개를 포함해서 총 352개이다. 그러나 2020년 국토교통부에서 공개한 『2020 도로 교량 및 터널 현황 조서』에 나타난 광주광역시의 교량은 404개소에 연장 45.3㎞로, 앞서 광주광역시청에서 공개한 자료와 정보가 상이하다. 1년 사이에 52개소의 교량 가설이 가능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2020 도로 교량 및 터널 현황 조서』에 따르면, 광주의 교량이 350여 개소에 머물렀던 시점은 356개소에 총 연장 41㎞였던 2013년이다. 때문에 국토교통부에서 제공한 『2020 도로 교량 및 터널 현황 조서』가 좀 더 최신의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국토교통부에서 공개한 교량 현황 조서는 광주광역시 직할 소속에서 관리하는 교량의 개소뿐만 아니라, 더 상위 기관[국가]에서 관리하는 모든 교량을 포함한 정보[예: 고속국도]일 가능성이 크고, 이 가능성을 제외하고도 두 곳에서 공개한 자료의 내용이 너무 상이하다. 예를 들어 국토교통부에서 공개한 『2020 도로 교량 및 터널 현황 조서』에서는 일반국도에 가설된 교량 44개, 국가지원지방도에 가설된 교량 26개, 광역시도에 가설된 교량 180개, 구도에 가설된 교량 84개로, 고속국도 교량을 제외하면 총 334개소의 교량이 집계된다. 그러나 광주광역시청에서 공개한 『2019 도로 및 교량 현황 조서』에서는 일반국도에 가설된 교량 45개, 국가지원지방도에 가설된 교량 24개, 광역시도에 가설된 교량 189개, 구도에 가설된 교량 94개로 총 352개소의 교량이 집계된다.
또한 광주광역시청에서 제공하는 『2019 도로 및 교량 현황 조서』는 광주광역시 내에 설치된 교량의 준공년도, 관리업소, 교량의 설계하중, 교량의 가설방식, 교량의 안전등급, 위치 등과 같은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광주를 5개의 큰 구[동구, 서구, 남구, 북구, 광산구]로 나누어 교량의 현황 파악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주 인근 장성군에 가설된 교량 현황까지 파악하여 작성하였다. 때문에 광주광역시청의 자료가 좀 더 상세하고 명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두 자료를 적절히 차용하여 작성하였음을 이 자료를 읽는 이들에게 명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