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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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魚登山韓末湖南義兵戰蹟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191-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한백 |
건립 시기/일시 | 1997년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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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3년 - 어등산 일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지정 |
소재지 |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191-4 |
성격 | 전적지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에 있는 어등산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활동의 중심지.
[개설]
어등산은 평야가 펼쳐진 전라남도 서부 지역에서 높은 곳이어서 주변 지역의 관측이 용이하고, 일본 군경의 추적을 파악하고 조치하는 데 좋은 장소였다. 또한 광주, 나주, 함평, 장성, 영광 등으로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한말 호남의병과 일본 군경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어등산과 주변 지역에서 벌어졌다.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은 어등산이 한말 호남의병의 숭고한 희생의 터전이었기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97년에 세워졌다.
[변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에 1906년 7월 김태원(金泰元)이 호남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기삼연(奇參衍)을 중심으로 호남의병들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
호남의병은 점조직(點組織)으로 조직되었으며, 점조직을 통해 작전 목표와 집결지·집결 일시가 통보되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양민을 가장하였기 때문에 일본 군경이 쉽게 의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많게는 100~200여 명, 적게는 30여 명으로 조직되어서 효율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호남 지역에서 많은 승전을 거두었고, 호남 지역이 한말 의병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어등산은 호남 서부 지역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지형적 특성, 그리고 쉽게 산에 오르기 힘들다는 성격에 호남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기삼연과 김태원이 중심이 된 호남의병은 1907년 혁혁한 전공을 거두면서 한말 의병활동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일본 군경은 호남의병을 토벌할 계획을 세워서 작전을 전개하였고, 1908년 4월 호남의병의 중심지인 어등산을 중심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 어등산을 포위하고 주변 마을을 수색하면서 숨은 의병을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어등산 서쪽,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박뫼마을에서 호남의병과 일본 군경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에서 김태원과 여러 의병장들이 전사하였다. 하지만 전라남도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 활동이 계속 전개되자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1월까지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벌이게 된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에서 의병 500여 명이 전사하고, 1500여 명이 붙잡히면서 한말 호남의병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위치]
송정중학교에서 어등대로를 따라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에 다다른다. 캠퍼스 내 잔디축구장이 보이는 곳 앞에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이 있다.
[현황]
어등산 한말호남의병전적지 표지석은 1997년 12월 한말호남의병기념사업 광산구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세워졌다. 2013년 어등산 일대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말 호남의병의 투쟁은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에서 연유된 반일 의식과 1904~1905년 러일전쟁 전후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다른 지역보다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어등산은 이러한 호남의병의 중심지로서, 호남의병의 활약상과 의의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