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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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樂亭記 |
영어음역 | Dongnakjeonggi |
영어의미역 | Dongnakjeong Pavilion Record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조동길 |
성격 | 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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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남수문 |
창작연도/발표연도 | 1420년대~1430년대로 추정 |
[정의]
1420~1430년경 남수문(南秀文)이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위치한 독락정의 건립 배경과 경관 및 그 의의에 대해 쓴 기문(記文) 형식의 글.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조선시대에는 삼기면이라 함.)에 고려 후기의 충신인 전서공 임란수(林蘭秀)[1342~1407] 장군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1371~1448]이 독락정을 건립하였다. 임목은 이 정자에 대한 기문을 아들 뻘인 남수문에게 부탁했고, 남수문은 존경하는 임목을 위해 「독락정기」를 지었다. 이 글은 목판에 새겨져 현재에도 ‘독락정’에 걸려 있다.
남수문은 1408년(태종 8)에 태어나 1426년(세종 8)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가 되었고, 『고려사절요』의 집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풍류를 즐기는 생활을 하다가 3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독락정은 1984년 12월 29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독락정의 ‘독락(獨樂)’은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따왔다고 「독락정기」 내용에 기록되어 있다.
[구성]
「독락정기」는 글의 성격에 따라 기승전결(起承轉結)로서 빈틈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글을 짓게 된 경위(기), 독락정의 위치와 경관 및 정자 건립(승), 명리를 초탈하여 자연을 즐기며 배우는 독락의 어려움과 그 철학적 의의(전), 본인이 따를 수 없는 임목의 높은 뜻과 독락정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결) 등으로 구분된다.
[내용]
「독락정기」는 기문의 특성상 뚜렷한 형식적 구분은 보이지 않으나, 그 내용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임목과의 관계 및 기문 청탁의 정황을 설명하고, ② 독락정 주변의 강과 산, 들과 길 등 경관을 묘사하며, ③ 임목이 경관을 감상할 독락정을 세우고, ④ 기문 쓰기를 승락하고 요산요수와 인격 수양은 동체임을 강조하며, ⑤ 임목의 자연 심취에 존경과 찬탄을 보내고, ⑥ 실천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임목의 독락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특히 둘째 부분에서는 실감나는 사실적 표현으로 빼어난 경관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많이 알려져 회자되는 부분을 인용해 본다. “강의 질펀한 모래밭 넓게 흐르는 물/ 하늘과 물이 한 빛인데/ 바람불면 푸른 주름살이오/ 달 비치면 은물결이라(江之平沙漫流 天水一色 風而綠皺 月而銀波)”
[특징]
남수문은 유가적 자연관과 수양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독락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뛰어남을 예찬하는 중에, “북으로 원수산(元帥山)이 성곽(城廓)처럼 둘러 있고, 남으로 계룡산이 반공에 솟아나고 그 동·서쪽 여러 산이 혹은 조회하는 듯하고, 혹은 읍하는 듯하여 기괴함을 팔고 특이함을 안은 것이 한 가지만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주위의 여러 산이 이곳을 향해 읍을 한다는 표현은 최근 여기에 행정복합도시가 건설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 기이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의의와 평가]
「독락정기」는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정중한 부탁과 나이 어린 옛 부하에게 예를 갖추어 글을 청하는 선비의 정신이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본받을 만한 인간관계의 전범으로 볼 수 있다. 자연을 개발논리의 관점으로만 보는 현재의 개발지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자연관이 엿보인다. 세상의 사람들이 욕심과 명예에 집착하여 눈앞의 자연이 주는 위대한 교훈을 잊고 세속에 파묻혀 사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자연을 수양의 스승으로 삼아, 자연은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관계임을 또 다시 성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