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123 |
---|---|
한자 | 女性運動 |
영어음역 | Yeoseong Undong |
영어의미역 | Women's Movemen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재 |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여성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 운동.
[개설]
여성 운동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확보하고, 여성 스스로 직업과 생활양식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총칭한다. 우리나라의 여성 운동은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에 저항하기 위한 항일 투쟁의 일환으로 발생한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에 저항하기 위한 국채 보상 운동과 물산 장려 운동은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힘을 각성하게 하였다. 더불어 여성들이 글을 깨치게 되면서 신지식의 수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여권 신장 운동이 남녀평등과 봉건 사회의 인습 청산 그리고 민족적 각성에 따른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신여성의 개념이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흐름은 애국 계몽 운동에서 출발하여 여권 신장을 위한 노력 그리고 해방 이후의 여성 운동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김천 지역에서의 여성 운동 또한 금릉학원에서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여자 야학부를 시작으로 김천여자청년회, 금릉여성회 등을 중심으로 여성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근우회의 성립과 함께 근우회 김천지회가 설립되어 여권 신장을 위한 여성 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여성 운동의 우익화가 결국 정권 지지의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관변 단체의 모습을 보이게 되지만, 신사회운동과 더불어 새롭게 변화한 여성 운동의 흐름은 남녀평등을 넘어 모든 사회적 차별 철폐에 대한 요구로 확장되고 있다.
[해방 이전의 여성 운동]
1. 여성 계몽 운동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라는 시대적 환경은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의 일환으로 애국 계몽을 통한 국권 회복을 도모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계몽 운동 또한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애국 계몽 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에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고, 쌀이나 패물을 모으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참여함으로써 조직적 사회 활동을 보여주었다.
국채 보상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1919년 3·1운동 이후로 일제의 폭력적인 무단 정치가 기만적인 문화 정치로 바뀜에 따라 1920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여자 청년회가 무수히 발족하여 여성 교육과 의식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은 지식 여성들이 억압된 여성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침으로써 여성 해방 운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의 연장선인 1923년 물산 장려 운동에서도 가정 소비 생활의 주역인 부인들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이고, 토산애용부인회를 발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이 운동의 물결은 기생들에게까지 번져 한때 이들도 면제 의복(綿製衣服)을 입었다.
전국적인 여성 계몽 운동은 차미리사에 의해 1920년 3월에 설립된 조선여자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야학을 통해 여성들에게 글과 신생활 정신을 가르치며 1921년 6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4개월간 전국 13도 73개소를 순회하며 계몽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회는 지방 여성의 각성은 물론 사회 전반을 계몽하는 데 크게 공연하였다.
이와 함께 여성 계몽 운동에 앞장선 또 하나의 단체로는 1922년의 조선여자고학생 상조회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24년 조선여자동우회로 개칭하면서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활동과 더불어 여성 해방을 위한 여러 단체들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각 지방에 40여 지부를 설립하고 순회강연, 토론, 강좌 등을 벌이며 여성 운동의 정신을 선전·계몽하고 언론 기관을 통하여 사회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여성동우회 운동은 미진하였던 당시의 여성 운동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에 발맞추어 김천에서도 1923년 5월에 금릉학원에서 여자 야학부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그 뒤를 이어 1925년 11월에는 금릉학원 산하 금릉유치원에서 김천여자청년회가 결성되었으며 장복희·라순금·김애옥이 강사로 활동하였다. 이어 금릉여자청년회와 금릉여성회가 결성되면서 김천 지역에서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 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1927년 신간회가 설립되는 등 민족 운동의 통일 전선적 요구 속에서 여성 운동계도 사회주의 여성 조직과 기독교계 여성 조직이 결합하여 1927년 5월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근우회는 전무후무한 여성 운동의 통합 조직이었으나, 여성 해방의 실천적 이념을 제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일제의 잔혹한 말기적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과 더불어 국권 회복 운동의 성격을 가진 여성 운동은 결국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이나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고, 여성 내부에서는 지배적인 남성 사회에 도전하는 여성 해방을 주장하면서 신문명에 대한 자각과 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시기 김천 지역에서 일어난 여성 운동 또한 이러한 계몽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2. 여권 신장
애국 계몽 운동의 성과로 말미암아 여성들은 주체 의식을 각성하고 남녀 평등의 권리 의식을 고취하게 되었다.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대표적인 단체로 1927년 5월 27일 창립되어 1931년에 해산된 근우회가 있다.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의 성격을 띠고 출범하였다. 근우회는 구시대의 봉건적 유물과 현대적 모순의 극복을 위해 모든 조선 자매들이 단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결혼의 자유, 공창(公娼) 폐지, 임금 차별 폐지와 산전 산후 임금 지불 등을 요구하였다.
근우회의 활동을 통해 여성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던 야학이 문맹 퇴치를 넘어 여성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권 신장을 위해 직접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전국의 약 60여 개 근우회 지회의 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여성의 의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조선 여성 운동의 현실과 그 방침,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과 단결, 남녀평등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근우회 김천지회는 1927년 9월 2일 금릉청년회관에서 발회식을 가졌고 다음 날인 9월 3일에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집행부를 결성했으며, 1928년 4월 16일에는 근우회 김천지회 회관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김천지회의 활동을 필두로 하여 대구, 영천, 군위 등지에서도 근우회 지회가 조직되었다. 매월 15일을 근우회 선전일로 정하고 선전 팸플릿 배포, 가정 방문, 강습회 등에 주력하면서 여권 신장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의 여성 운동]
일제 강점기에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애국 계몽 운동과 여권 신장 운동은 해방과 더불어 여성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일제의 강도 높은 탄압 정책에 따라 사회주의 여성 운동은 비합법 여성 노동운동과 여성 농민 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지하로 숨어들었고, 1930년대 후반에 기독교계와 교육계,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은 일제의 침략정책, 내선일체의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고 정신대, 징병, 징용, 학병 동원 참여를 촉구하는 강연, 가두선전, 방송, 위문공연을 하였다.
따라서 해방을 맞이하는 입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직후에 여성 운동계는 건국준비위원회와 보조를 맞추어 정치적 입장이나 일제하의 행적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의 여성들을 모아 8월 17일에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진주가 확실해지면서 친일 경력을 가진 자들이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위대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일제에 의해 수입된 현모양처주의를 강조하면서, 이승만(李承晩)과 한민당의 정치 노선을 추종하는 각종 집회에 여성들을 동원하는 데 치중하였다.
반면 자주 민족국가 건설 과업을 수행하면서 여성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여성 운동가들은 건국부녀동맹에 남아 1945년 12월 22일 조선부녀총동맹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8·15 해방 이후 최초의 파업인 경성방직 파업과 1945년 말의 영등포 동면섬유 파업을 이끌어내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지불, 생리 휴가와 같은 여성 노동자의 특수한 요구들을 쟁취하였다.
이러한 좌우 대립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성 운동계는 근우회에서 주장하였던 공사창제 폐지를 함께 요구하여 1948년 2월 14일 미군정으로 하여금 공사창제 폐지를 법령으로 공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3년 동안의 좌익 단체 탄압 속에서 좌익 여성 단체가 소멸되고 우익 여성 단체가 미군정의 부녀국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며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분단 시대 여성 운동은 여성 해방 이념의 부재, 권력과의 결탁, 대중과 유리된 여류 명사 중심의 조직이라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 운동의 성격은 결국 1950년대와 1960년대 정부 시책에 호응하는 사회봉사 및 위문 활동, 정권지지를 위한 관제 모임 등을 주요 활동 내용으로 하게 되었다. 앞으로 여성 운동의 과제는 전체 사회운동과 여성 운동을 내용적으로 결합하여 여성 운동의 저변 확대를 모색하고 대중적인 실천으로 여성 운동의 목표를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