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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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祖-權擥- |
영어의미역 | The Tale of King Sejo and Gwon Ram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집필자 | 안상경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권람과 세조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권람(權擥)[1416~1465]은 1453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한명회와 같이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진봉된 뒤 좌의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죽은 뒤에는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는데, 권람의 묘소가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채록/수집상황]
1982년에 출간한 『전설지』에 수록되어 전한다.
[내용]
권람은 젊을 때부터 대가집 자제답게 글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지고 명산 고적을 찾아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반드시 한명회와 더불어 함께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르는 곳마다 글을 읽으며 문장을 지어서 회포를 풀었으나 벼슬길에는 마음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다. 부질없이 새삼스레 무슨 과거냐고 일축하다가 생각을 고쳐 과거를 보기로 했다.
권람은 그해 사헌부감찰을 제수받고 이듬해 집현전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수양대군(세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 음주(音註)를 편찬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후의 일이었는지 그전의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설에는 권람이 한명회를 세조에게 소개했다고도 하고, 또 한명회가 권람을 세조에게 소개했다고도 한다. 어찌됐든 수양대군이 권람과 한명회와 더불어 계유정난을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 것만은 사실이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권람은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권람이 정승으로 있던 어느 해 어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벌였는데, 지체 높은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초헌과 일산이 문을 메우고 학발(鶴髮: 학의 털)이 마루 위를 뒤덮을 정도였다. 세조 역시 찾아와 친히 권람의 어머니께 헌수했다고 전한다.
권람이 목멱산(현 서울 남산) 북쪽 기슭, 비서감(祕書監)의 동쪽 바위 벼랑 쪽에 집을 짓고 후주당(後週堂)이라 이름하여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세조가 찾아왔다가 서쪽 벼랑에 돌샘이 있으므로 어정(御井)이란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두 사람의 친한 정도가 짐작된다고 하겠는데, 그래서였는지 훗날 권람은 죽어서 세조묘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세조와 권람 이야기」는 계유정난이란 역사적 사건을 밑바탕에 깐 채 세조와 권람의 인연이란 모티프로 민간에 회자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임금과 신하라는 벽을 허물고 평생을 교유한 두 사람의 우정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